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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에 취해 나를 들여다본다

기사입력 2017-11-09 16:19

[커버스토리] 취미자산가들의 향연, 두 글자로 본 취미 – 서예

필자는 3년 전에 은퇴를 했다.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심하게 된 것은 은퇴 준비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되면서부터다.

필자도 쉼 없이 달려온 직장생활 43년 만에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깨알 같은 시간들을 뒤로 한 채 텅 빈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허전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허둥대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아보니 정녕 자신은 잊어버리고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집 사랑방은 필자의 큰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서당(書堂)이었다. 밤이 되면 사랑방에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틈틈이 서당으로 불러 천자문을 읽고 쓰기를 가르쳐주셨던 큰아버님의 배려로 제법 붓 잡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께 사사

정년퇴직 후에는 그동안 잊고 살아온 서예를 다시 해보겠다는 희망의 불씨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천자문 읽는 소리와 아련한 묵향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퇴직이 몇 년 안 남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입문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연마하던 필자에게 선생님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주셨고 글쓰기 이전에 마음가짐의 정갈함을 늘 강조했다.

어느 날 오후, 종로3가에 있는 서실(書室)을 찾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예 개인지도를 받는 곳이었다. 필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주시는 스승님을 위해 가끔씩 간식을 준비해 찾아가곤 했다. 그날도 간식거리를 준비해 서실을 찾았는데 마침 후배 문하생이 지도를 받고 있었다. 느닷없이 필자가 등장하자 그날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신 선생님께서는 막걸리 한잔 하자며 극구 붙드셨다.

평소에도 선생님과 가끔씩 들르는 종로3가 단골 녹두빈대떡 집에서 스승과 제자가 막걸리 사발을 앞에 놓고 세상 사는 얘기에 푹 빠졌다. 선생님은 값비싼 양주에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해도 이렇게 조촐한 이야깃거리를 안주 삼아 기울이는 막걸리 한 잔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님과 호젓한 빈대떡집에 마주 앉아 ‘막걸리 한잔의 행복!’으로 담소삼매경에 빠지다 보니 어린 시절 시린 손 호호 불며 주전자 들고 막걸리 받으러 가던 추억이 떠올랐다. 고사리손에 주전자 들고 고개를 넘던 기억은 아버지와 관련한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필자는 서예에 입문하면서 선생님의 지도하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면서 붓글씨를 배워나갔다. 다음 시간까지 해갈 과제물을 숙제로 받아오는 날이면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몇 번이고 쓰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그중 제일 잘 썼다고 생각되는 한 점을 골라 의기양양하게 서실로 달려가면 선생님은 가차없이 따끔한 지적을 하셨다.

어쩌랴! 다음번 과제물을 받아와 선생님께서 지적했던 부분을 염두에 두고 또다시 붓과 씨름했다. 묵향에 취해 어질어질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했다.


선배 문우들과 함께한 전시회

2010년 초, 우연한 기회에 중국 산둥 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린이(臨沂) 시를 여행하게 되었다. 당연히 린이 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왕희지의 고택을 방문했다.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는 지금의 산둥 성 린이 현에서 태어났으며 동한 시대에 시작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서예 공부를 하던 중 돌아보게 된 왕희지의 발자취는 필자를 더욱 분발하도록 했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던 2013년 11월의 어느 날, 인사동 모 전시회관에서 그동안 틈틈이 갈고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턱없이 부족한 필력이었지만 까마득히 높은 선배 문우들 틈에서 몇 점을 출품하게 되었다. 비록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관계로 선배 문우님들 눈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정진하는 계기로 삼고자 겁 없이 전시회에 명함을 내밀었다. 하기야 처음부터 잘 쓴 사람은 없겠지만 공부를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자 해서였다.

쉼 없는 도전정신은 내면의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다. ‘정년퇴직’은 은퇴자의 무덤이 아니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는 반전의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니어들이여, 용기를 내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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