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여행지⑯
파리까지 12시간. 리스본까지 다시 2시간 반. 살던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때 가장 궁금한 것은 언제나 ‘돌아올 때의 나’였다. 알파마 지구의 예약된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내다본 차창 밖의 리스본은 어둠이 내려 인적조차 뜸했고 꾸미지 않은 벽에선 ‘낡은 도시’의 냄새가 났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그곳에 가기 딱 좋은 날씨에 딱 맞는 상황, 딱 좋은 사람이 있는 경우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직 나를 북돋운 건 단 하나 “갈까? 가자!”라는 두 단어였다.
이쯤 되면 (내 책 제목처럼) ‘여행에 미쳤다’는 표현이 과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도시
유럽의 서쪽 끝,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이 작은 나라는 일반적으로 스페인에 왔다가 잠시 스쳐 지나거나 건너뛰기 일쑤다. 그러나 몇 년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주인공 제레미 아이언스(그레고리우스)가 자아를 찾아 충동적으로 찾아 나선 리스본의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제대로 다시 가보고 싶다던 리스본행을 결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럽이지만 유럽이 아닌 느낌. 겉멋이라고는 없는 소박한 사람들과 인고의 세월을 겪어낸 초연함은 나로 하여금 이 빈티지한 도시에 빠져들게 했다. 바스쿠 다 가마와 엔리케 왕의 대항해 시대에 세계 최대 제국을 거느리는 영광을 누렸던 이 나라는 서서히 쇠락을 거듭하다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다시 한 번 크나큰 재앙을 겪게 된다.
리스본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는 절망 속에서 1934년부터 이어진 살라자르 독재정권은 순박한 사람들을 괴롭혔으나 마침내 1974년 무혈 카네이션 혁명(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배경)으로 끝을 맺게 된다. 갖은 풍랑을 겪어낸 이들의 표정엔 평온함이 서려 있다.
붉은 테라코타 지붕과 아줄레주 벽화
골목 가득 울려 퍼지는 파두 선율과 포트와인까지 눈과 귀와 입이 호강하는 곳. 아랍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에 전해준 가장 아름다운 흔적인 푸른 아줄레주 타일과 위트 넘치는 그라피티 벽화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로 대표되는 파두 음악과 에그타르트, 포트와인에 이르기까지 볼거리, 들을거리, 먹거리가 넘쳐나는 리스본이야말로 눈과 귀와 코가 다 만족스러운 곳이다. 심지어 밟고 다니는 보도블록조차 아름답다. 갖가지 색의 석회석을 일일이 손으로 쪼개어 문양을 만든 칼사다 포르투게사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마모되면서 석양 무렵이면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난다. 돌이켜보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이나 마카오의 세나두 광장에서도 비슷한 것을 본 듯하다. 한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이유다. 이렇게 여행은 어쩔 수 없이 세계사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준다.
리스본의 상징 노란색 트램
리스본에는 툭툭에서 페리까지 다양한 교통수단을 경험하는 재미가 있다. 일곱 개의 언덕으로 되어 있는 리스본을 구석구석 걸으며 탐험하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리스본의 상징인 28번 트램을 타보지 않으면 이곳을 제대로 여행했다 할 수 없다. 언제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28번 트램은 마치 콧대 높은 여인 같다. 한참을 기다리게 하고, 인내심 없는 사람들은 돌아서게 한다. 그래도 북적이는 트램에 올라 얼굴이라도 닿을 듯 건물 안 사람을 스쳐갈 때의 스릴은 이곳이 아니면 경험하기 힘들다. 리스본에서 가장 높은 상 조르제 성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 테주 강과 알파마 지구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서 점심을 먹는다. 골목골목 걷는 재미로 가득한 알파마 지구는 아치와 계단, 목재 발코니, 사람들이 사는 모습 하나하나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과거로의 여행을 선물해준다.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
대항해 시대의 영광이 남아 있는 벨렝 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 해양박물관이 있는 벨렝 지구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무덤이 있는 내셔널 판테온은 결코 빼놓아선 안 될 곳이다. 웅장한 돔으로 된 내셔널 판테온에 들어서니 높은 천장 가득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가 가슴을 파고든다. 국민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포르투갈의 눈물이라 칭한 테주(타호) 강은 거친 대서양과 이어져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없이 좋은 사색의 장소다. 페리로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반대편 카샬랴스 지역에서 벌거벗은 듯 온몸을 드러내고 있는 리스본의 전경을 감상해보자.
코메르시우 광장을 울리던 선율과 포트와인
리스보아. 매혹적인 항구. 이름마저도 이토록 사랑스런 도시를 떠나야 하다니 울적해진다. 리스본의 샹젤리제라 불리는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이곳 특산물 바칼라우(대구)를 먹으며 첼리스트의 선율에 센티해진다. 자세히 볼수록, 가만히 볼수록 매혹적인 리스본. 와인과 브랜디를 섞어 만들어 달짝지근하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은 포트와인은 두어 잔만 마셔도 취기가 돈다. 젊은 시절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이젠 늙고 나이 들었지만, 세상의 풍랑을 주름에 간직한 채 성형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 이 도시가 전해주는 묵직한 푸근함에 안겨버린 날들을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다. 숙소로 가는 길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이 잠시 쉬던 상 페드루 드 알칸다라 전망대 벤치에 앉아 책 속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느 곳을 간다고 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