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

로키마운틴 스키장의 함박눈

기사입력 2018-12-12 08:44

[동년기자 페이지] 눈처럼 아득한 추억들이 흩어지네

2015년 겨울, 미국에 사는 아들과 딸을 만나러 갔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 유학을 마친 아이들이 그곳에 터 잡아 산 지 10년이 흘렀지만 사는 것 보러 미국에 갈 시간이 없었다. 직장생활에 매어 있던 몸이라 불가피하게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야 꿈에도 그리워하던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출발하던 날 인천공항은 겨울비가 왔는데 비행기는 멋진 구름바다 위를 날았다. 창밖의 하늘은 그야말로 판타스틱했다.

국내 항공이 아닌 유나이티드 항공을 이용하면서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많은 외국인 사이에 끼어 앉아 불편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은 언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예전과는 다르게 한국인 탑승객도 꽤 많았다. 게다가 영어와 한국어로 한 번씩 해주는 기내 안내 멘트는 불편했던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기내식으로 불고기와 치킨, 따뜻하고 통통한 샌드위치 한 조각을 먹었다. 후식으로 제공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느긋하게 창문을 통해 구름바다를 내려다봤다. 저 구름바다 밑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콜로라도에 정착해 10여 년째 살고 있는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창밖 구름바다를 보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지 11시간 만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미국 국내 항공으로 환승, 2시간을 더 날아갔다. 어느새 하나 둘, 불빛을 밝히는 덴버 공항이 시야로 들어왔다.

여행의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곤한 첫날 밤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눈 폭탄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덴버가 춥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광경은 난생 처음 보는 듯했다. 온 식구가 마당으로 나와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눈을 다 처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마냥 신이 난 손자 녀석과 함께 눈사람도 만들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한낮이 되자 햇살 아래 그토록 많은 눈이 요술처럼 녹아버렸다.

덴버에서의 첫 휴일, 아이들은 로키마운틴으로 스키를 타러 가자고 했다. 스키 세트 일체는 미리 준비돼 있었다. 오래전 용평스키장에서 아이들에게 처음 스키를 가르쳐줬더니 하루 전날 저녁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키와 스노보드를 손질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덴버에서 스키장으로 출발할 때 말갛던 하늘이 갈수록 흐려지더니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자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콜로라도는 해발 약 1600m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기가 맑고 하늘도 파랗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로키마운틴이 가까워올수록 더 많은 눈이 내렸지만 스키장을 향하는 차량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스키장에 도착해 하염없이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스키 장비를 착용하고 곤돌라에 올랐다. 끝없이 올라가는 곤돌라에서 내려다본 로키마운틴의 스키장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미끄러지듯 슬로프를 내달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마치 동화 속 나라의 모습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가족 단위로 행복하게 스키장을 누비고 있던 그날은 마침 성탄절이었다.

스키장 정상에 도착해 곤돌라에서 내리니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아름다운 설경과 광활한 급경사 슬로프. 로키마운틴의 스키장 풍경에 매료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나무 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송이는 때때로 불어오는 산바람에 후드득 떨어졌다. 몇 번의 워밍업을 마친 후 드디어 슬로프에 섰다. 스키를 타지 않은 지 몇 년이나 됐으니 처음 타는 사람처럼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러 차례 연습을 한 끝에 그린코스로 향했다. 그린코스는 기초 코스를 막 끝낸 다음 가는 중급 코스인데, 생각보다 경사가 가팔랐다. 처음엔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손자 녀석은 옆에서 보드를 타면서 할아버지를 격려했다. 이 멋진 곳에서 아내와 아들, 딸네 가족 등 온 가족이 함께 즐긴 스키와 보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글렌우드 스프링스 노천온천에 들렀다. 하얗게 눈이 덮인 산을 바라보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세상의 온갖 피곤함과 번잡스러움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의 멋진 설경은 두고두고 마음에서 그리움처럼 피어오르곤 한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더 궁금해요0

관련기사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댓글

0 / 300

브라보 인기기사

  • [브라보가 만난 욜드족] “삶이 곧 힙합” 춤주머니 아저씨
  • [브라보가 만난 욜드족] “땀으로 지병 없애고, 복근 남겼죠”
  • 패션부터 여행까지… 소비시장 주도하는 욜드족
  • [브라보가 만난 욜드족] “커피 내리는 현장 남고자 승진도 마다했죠”

브라보 추천기사

브라보 테마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