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이구, 주책이야]
주책이라는 말은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을 뜻하는 말이다. 놀림조로 이야기할 때는 ‘주책없다’를 써야 옳다. 그런데 요즘은 반어법(?)처럼 ‘주책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언어는 시대 상황에 따라 그렇게 변화해가는 것 같다.
주책이 없는 사람을 예로 들라면 대표적인 인물이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닐까?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가끔씩 보인다. 그런 사람이 있기에 우리 삶이 재미있고 또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도 있다.
역사적으로 주책없는 인물을 꼽으라면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 중 궤변학파 사람들을 빠트릴 수 없을 것 같다. 소피스트(Sophist)로 불리는 그들도 한편으로는 주책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해준다.
고등학교 때 필자와 한동안 친했던 K는 모범생이고 성실한 친구였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도 성적은 늘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평소 친구의 말과 행동을 보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결과였다. 그런 일이 계속 발생하다 보니 친구들은 그를 주책이 없는 친구로 생각했다.
필자가 아는 지인 중에도 주책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정말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다. 어찌 보면 주관이 확실하고 판단력도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주책이 없는 행동을 한다고 여겨지는 것일까. 매사에 현실적이지 못하고 꿈만 꾸는 이상주의자로 보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는 단시간에 마스터할 수 있는 영어 회화 교재 ‘노걸대’를 저술하겠다며 투자자를 모집한다고 했다. 노걸대란 우리나라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날 중국과 무역하던 상인들을 위한 중국어 회화 교재 이름이었단다. 하지만 그 후 교재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어느 날은 조용히 지내는가 싶더니 영화 제작을 위해 감독 일을 시작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진짜로 상업영화 한 편을 제작했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 들어봤더니 대학 다닐 때 KBS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부터 영화 제작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제작에 자신이 있다던 그는 얼마 후 유통 분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또 어느 날은 모 정당에 가입 신청서를 내더니 갑자기 국회의원 출마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쯤 되면 그는 주책이 없는 사람을 넘어 주책바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를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도전정신을 부러워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희망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능력자다. 단지 그의 행동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주책이 없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가 꿈을 실현하는 날이 온다면 비범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주책과 주책바가지의 차이는 그래서 상식과 비상식의 차이가 아닐까?
우리는 갈릴레오 같은 천재나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듯한 천재들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책바가지도 주변 환경이 바뀌면 대성할 수 있다. 소피스트의 의미가 ‘지식이 있는 현명한 자’를 뜻한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주책이 없는 사람을 두둔하는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누가 보면 주책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