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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하루

기사입력 2017-02-06 19:11

혈당 관리 때문에 억지로라도 운동을 해야 하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 뒤편에 마침 운동에 딱 좋은 왕복 한 시간 거리의 산책로가 생겼다.

몇 해 전에 그렇게나 시끄러운 굉음으로 필자를 괴롭혔던 공사가, 끝나고 보니 이렇게 멋진 운동 코스가 되었다.

참기 힘든 소음 때문에 일부러 외출하는 등 불편을 겪었지만, 결과로 이런 혜택을 받게 되어 짜증을 냈던 게 슬그머니 미안 해 지기도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에서부터 시작되어 2km 되는 정릉 입구까지 큰길 뒤편으로 바닥에 초록색의 폭신한 산책길이 만들어졌는데 담당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왕복 4km면 하루 운동량에 알맞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매우 기쁜 마음으로 걷기 운동을 하게 되었다.

개천을 따라 걷는 내내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경치와 자연 생태를 볼 수 있어 주민이나 운동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은 곳이다.

오늘은 기온이 많이 내려갔지만 단단히 차려입고 걸으러 나갔다.

쨍한 차가움이 콧마루를 시큰하게 한다. 그러나 일단 나와 보니 의외로 상쾌하다.

옆쪽의 개천이 한여름엔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폭포처럼 요란한 물줄기를 보이지만 지금은 얼음이 꽁꽁 얼어있다.

개울에 솟아 있는 대로 바위나 작은 돌멩이가 삐쭉 나온 곳을 빼고는 모두 하얀 얼음투성이인데 어느 한 곳을 보니 반반한 얼음판이 보인다.

겨울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을 위해 누군가 일부러 물을 채워서 썰매장을 만들어 주신듯하다.

며칠 전엔 그곳에서 몇몇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언니가 끌어주는 대로 신 난다고 꺅꺅대던 아이도 있었고 제법 반듯한 나무로 썰매의 모습을 갖추고 씽씽 얼음 지치는 아이도 있었다.

필자도 어릴 적 대전에 살 때 삼촌이 만들어주신 네모난 나무에 쇠붙이를 바닥에 붙인 썰매를 타 본 적이 있다.

친할아버지댁 포도밭 근처에는 겨울에 빈 들판이 많았다. 잘라 낸 볏짚 밑동이 삐죽 솟은 바닥에 물을 대고 차가운 날씨를 기다리면 널따란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었다.

간혹 스케이트를 타는 어른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방학을 맞은 동네 아이들이 썰매를 타는 신 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삼촌은 긴 꼬챙이의 끝에 뾰족한 못을 박은 썰매 손잡이도 만들어 주었지만 필자는 그걸 사용하지는 않았고 삼촌이 줄을 매어 끌어주는 썰매 타기를 좋아했다.

나무 썰매에 앉아 삼촌이 마구 달리며 끌어주면 스르르 밀려나가던 그 짜릿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이 잊히지 않으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오늘은 너무 추워서인지 아무도 나와 놀지 않는 빈 얼음 터를 보니 쓸쓸하다.

역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는 모습이 보여야 누군가 만들어 주신 썰매장의 진가가 보일 것 같다.

그래도 몇 명의 아이들이 얼음 덮인 개울에 앉아 노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추운 날 얼음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해서 “애들아, 거기서 뭐하니?”하고 물었다.

“얼음 속에 물고기 있나 보려고요.” 날씨도 추운데 자연 속에서 노는 아이들이 귀엽기도 하고 필자 오지랖에 미소가 떠오른다. 개천이 깨끗해지면서 물속에 작은 고기떼가 많이 생겼다. 그래도 이렇게 추운데 물고기들이 그대로 있는지 필자도 궁금하긴 하다.

이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개울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놀고 있는 사이좋은 청둥오리 한 쌍을 볼 수 있다. 꼭 청둥오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록색과 여러 색이 섞여서 반짝거리는 털을 가졌으니 아마 청둥오리일 것이다.

지난번에 보였던 이 오리 부부도 오늘은 너무 추워서 나오지 않았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은 도심 속 산책로에서 그림 같은 멋진 풍경을 볼 수도 있는데 무리 지어 있는 갈색의 억새풀 숲이다.

이곳을 보면 어디 아주 먼 곳에 여행 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빠른 걸음으로 산책로를 왕복하니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다음번엔 얼음판에서 신 나게 노는 썰매 타는 아이들도 보고 싶고 개울물 속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노는 청둥오리도 보고 싶다.

필자 어린 날 삼촌이 끌어주던 나무썰매를 씽씽타며 즐거워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어 본다. 차가운 겨울날의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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