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공개된 줄거리만 보고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왠지 불편한 진실을 피하고 싶어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시니어들에게는 마치 선전포고 하듯 우리 또는 우리 주변에 곧 닥칠지도 모를 문제이기에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온 영화였다.
주인공을 맡은 여배우도 연기하기 전에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해야 한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에서 여배우는 어렵게 영화를 찍기로 결정하고도 촬영 내내 곤혹스러웠고 영화 완성 후에도 우울감에 헤어나기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주연 배우의 마음처럼 필자도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마치 숙제처럼 봐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망설이다 결국 막 내릴 즈음 이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그 배우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보고 난 후에도 몹시 우울했다.
돈은 있지만 병들어 수족을 움직일 수 없는 노인, 가난하고 치매 초기 노인, 그리고 몸도 정신도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지만 고독 사를 두려워하는 외로운 노인 이렇게 세 명의 노인을 하루하루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절대빈곤의 여자가 차례로 죽여준다.
죽여주는 사람도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다 우리나라 노인문제를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이고 덤덤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연명만 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죽음보다 고통스러워하고 품위와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노인들을 통해 안락사(존엄 사)에 대한 논의에 물꼬를 트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영화가 지나치게 덤덤하게 존엄사로 직진하다 보니 주제전달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봐도 심하게 말하면 살인(자살) 방조의 느낌이 강하게 들어 불쾌하기까지 하였다.
힘들고 어렵게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재 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 삶을 모두 너무 굴욕스럽게 만든다는 잔인함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아무리 노후준비를 완벽하게하고 건강관리를 잘한다 한들 절대 병들지 않고,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예견치 않은 병과 고독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이런 우울한 영화를 피하기보다는 잘 죽는 법에 대하여 생각하고 현명에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웰 다잉(well-dying)’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통해 건강하고 삶을 유지하며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웰 다잉(well-dying)’도 함께 연장선에서 생각을 해야 할 거 같다. 웰빙의 아름다운 완성은 웰다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