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만 깨면 시니어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어
최근 그림을 취미로 하는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 사이에 회자되었다. 배우 김혜수와 구혜선의 그림이 아트페어에 걸린 이야기가 화제가 되더니, 배우 하정우의 그림이 수천만원에 거래된다는 이야기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러다 가수 조영남의 대작 논란으로 ‘아트테이너’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그림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유희’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젤을 세운다. 그리고 하얀 캔버스를 올려 조금씩 스케치를 한다. 아마 노후의 취미생활을 꿈꾸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상상해 본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통계청의 ‘201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50대는 53.2%가, 60세 이상은 56.4%가 노후를 보내고 싶은 방법으로 취미활동을 꼽았다. 자원봉사나 종교활동 등 다른 활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실제 여유시간을 보내는 여가활동으로 50대의 72.2%가, 60대 이상의 81.2%가 가장 간단한 TV 시청을 꼽았다. 대다수가 이상과 현실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예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응답은 3%도 되지 않았다.
심리적 장벽이 높은 취미 ‘미술’
미술은 시니어들을 위한 취미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분야 중 하나다. 시니어 대상 교육기관에서 미술은 빠지지 않는 단골 분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붓을 손에 쥐지 못하는 시니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선입견이라고 권인수 화백은 설명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서 5년째 일반인과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회화를 가르치고 있는 화실 ‘아트담’의 대표이기도 한 권 화백은 회화나 미술에 대한 편견이 장벽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가 입시 교육에 집중하면서 학생들이 미술, 그러니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초등학교에서 멈춘 셈이죠. 잘 못 그리는 것이 당연해요. 그런데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재능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에요.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수많은 달인들을 보세요. 그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랜 직장생활과 노력 덕분이죠.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선입견 중 하나는 그림은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는 것. 그러나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만 따지면 결코 그렇지 않다. 화실 수업료를 제외하면 이젤과 물감, 붓 등의 구매비용은 25만원 내외에 불과하다. 사진이나 자전거 등에 비교하면 되레 저렴한 취미인 셈이다. 이나마도 캔버스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을 강습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교육기관도 있다.
학원…화실…본인에 맞는 곳 선택을
구청 문화회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는 다른 취미와 병행이 쉽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교육 인원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강사가 1대 1로 지도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학원은 입시 미술을 겸하거나 정해진 강의 위주로 운영하는 형태가 대부분이고, 화실은 1대 1 지도를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미술학원은 대학 인근에 많고, 화실은 반대로 주거지역 주변에 많다. 수업 형태나 시간, 수업료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상담을 통해 충분히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본인에게 맞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림이 시니어에게 주는 장점은 다양하다. 미술 수강생들은 운동에 비해 체력적으로 제한이 없는 취미이면서, 고도의 집중을 통해 잡념을 사라지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11년째 송파에서 화실 ‘모노그라프’를 운영 중인 서양화가 김용일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시니어들에게 제공하는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평생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중 하나죠. 적은 비용에 비해 얻는 성취감도 크고요.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배우면 남에게 그림을 선물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서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자존감도 상당합니다. 그룹 전시회를 통해 본인의 그림이 남에게 인정받거나 팔리는 경험은 시니어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화실에서 형성된 커뮤니티를 통한 사회활동도 그림을 배우는 과정이 주는 매력 중 하나다. 앞서 소개한 아트담은 인근 구치소 면회자들을 위해 대기실에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고, 모노그라프의 경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그림 봉사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전시회 활동은 그림에 대한 욕구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일부 지역의 경우 화실은 체면을 내려놓는 휴식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고소득층 수강생들이 많은 한 화실의 관계자는 “재벌이나 정치인, 연예인 등이 신분을 숨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유난히 걸레질이나 설거지에 열중했던 한 회원이 지자체장의 부인이라고 밝혔을 때 주변에서 적잖이 놀란 적도 있어요. 사교를 위해 일부러 모인다기보다, 본인의 원래 모습을 찾아 순수한 문하생으로서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니 관계가 홀가분해지는 것 같아요.”
그림 그리기는 치매 예방에 큰 도움
그림은 심리적인 부분 이외에 실제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의 유명한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의 신경과 전문의 로즈버드 로버트는 지난해 발표한 연구 논문을 통해 “그림 그리기 등 노년의 미술 활동이 경도인지장애(치매의 전 단계)에 걸릴 가능성을 73% 낮춰준다”고 발표했다. 그는 4년간 256명의 85세 이상 노인을 관찰했는데, 미술 활동이 수공예(45%), 사교활동(55%), PC활용(53%)보다 인지기능 보호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그리는 것이 경도인지장애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미술 활동을 통해 마음과 정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손의 미세한 운동과 관련된 신경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자극들이 신경세포의 퇴화를 방지하고, 새로운 신경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인지기능 유지에 사용되도록 변화를 일으키는, 일종의 신경가소성 효과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그림 창작활동은 치매 예방뿐만 아니라 시니어들의 전반적인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술 활동은 인지기능이나 창의력 향상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추억 회상을 통해 의미있는 대화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불어 의사 소통 능력도 향상시키죠. 자아감이나 자존감의 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심지어 치매환자 간병인의 삶의 질까지 향상시킨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마포복지관에서 수채화를 가르치고 있는 류영선 강사는 “소질을 걱정하는 회원분들에게 관심이 곧 소질이라고 늘 말씀드려요.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릴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니까요. 실제로 시작하고 나면 기대 이상으로 쉽게 적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붓을 잡고 행복하다는 말씀을 연발하시는 회원분들을 보면 다른 분들도 주저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