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고버섯 재배로 새로운 인생 설계하는 충남 당진의 이규호씨
나는 면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던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선택한 도시생활이었지만 50이 넘으면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아직도 어려웠다. 직장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며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이제 표고재배 등 새로운 희망을 품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 겪으면서 귀향 결심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농촌의 중농가정에서 나서 성장하는 동안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동화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요즘이야 논농사, 밭농사 모두 기계화되고 일손이 많이 가는 농사는 기피하면서 단위 노동력당 경영하는 면적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60~70년대에는 논농사만 하더라도 두엄내기, 논갈이, 써레질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하거나 일부 축력에 의존했다. 간혹 기계를 사용했지만 아주 초보적인 기계에 의존하는 정도였다.
농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퇴비장, 토끼사육장 같은 시설에서 토마토 같은 밭농사나 토끼사육 등 농사 체험을 배우고 익혔다. 이후 가까운 지역의 지명도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들의 소망에 따라 농업관련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때 체계적이고 학문화된 각 부문의 농업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등 과정을 이수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부모님은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용해 면 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농촌생활의 갖가지 어려움, 각종 편의시설의 부족, 2세 교육을 위한 교육환경의 열악함 등을 이유로 대도시의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이 보유한 농지는 두 분이 충분하게 경작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다.
80년대 말 변환기에 나와 중소기업에 몸담게 됐다. 그러면서 값싼 노동력을 찾아 회사가 중국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10여년 간의 중국생활을 했다. 한 때 거침없는 성장으로 코스닥에 상장했던 회사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영업이익이 공장손실을 메꾸지 못하는 등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공장을 통폐합하고 조직을 축소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젠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돼 사직했지만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주식에 투자했던 여유자금마저 상장 폐지되는 바람에 허공에 날리고 실업자가 됐다.
실업급여를 받는 6개월 동안 ‘취업이야 되겠지’하는 기대 속에서 인크루트를 비롯한 취업포털을 통해 수많은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취업에 실패했다. 50을 넘긴 나이가 핸디캡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작은 아이가 대학졸업을 3년이나 남겨두고 있어 하루라도 소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가정주부라는 틀을 벗어난 적이 없던 안식구가 참다못해 월 100만 원 정도 급여를 주는 직장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고용노동부 취업포털인 워크넷(worknet)에 올린 내 이력서를 보고 주유소 소장을 제의해 온 주유소가 있어 일을 시작했지만 전 소장은 퇴사하지 않고 모든 일을 알아야 한다며 계산원, 주유원 등으로 월 130만원의 보수를 주고 일만 시켰다.
회사에 불만이 많은 가운데 계속적인 취업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한 지역 중소기업으로부터 입사제의를 받고 연 3300만원의 보수로 출하관리 업무로 출근하면서 농사일을 병행해 나갔다. 농사를 지으며 모르는 부분은 경험 많은 어머님이나 친구한테 자문을 구하며 또 남들이 하는 상황을 보거나 과거에 봐왔던 기억을 살려 해나가고 있다.
그러다 지인의 표고농장을 보고 온 뒤 기대를 가지고 실험적으로 시작한 농사가 표고재배다. 매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 엔진 톱을 구해 산에 있는 참나무나 밤나무를 베어 1m 전후의 길이로 토막을 내고, 표고종균을 넣을 수 있는 가는 나무는 나무보일러에 들어갈 정도의 길이로 잘라두었다가 화목으로 쓴다.
1월말에 군 산림조합에 표고종균을 신청하고 3월말 종균이 도착하면 모아 놓은 참나무에 5cm 폭에, 길이 10cm 전후의 간격으로 천공기로 구멍을 뚫고 성형종균을 넣고 물 주기 좋게 쌓아두고 15일 간격으로 물을 주고 차양 막을 설치해 주는 등의 관리를 한다.
◇바쁜 일 없는 시기 수입 짭짤한 표고농사
관리를 잘 하면 종균을 넣은 당년 가을에 표고를 수확할 수 있다고 교재에 나와있지만 내 경우에는 다음해 가을에 표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확된 생표고는 거래처가 없어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다듬어서 햇볕에 말려 저장했다가 구매자가 나타나면 시중가인 1kg에 5만 원에 팔고 있다.
표고재배는 중장비 도움 없이 하려면 통나무를 자르고 나르고 세우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중노동이지만 표고수확이나 물주기 등이 비교적 수월한 일이다. 어느 곳에서나 중국산 표고가 넘쳐나기 때문에 가격이 낮아 일이 힘든 것에 비해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온성 표고를 선택하면 3~4, 10~11월에 수확되기 때문에 일이 없을 때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부족한 지식을 메우고자 산림조합에서 출간한 ‘표고재배기술’이라는 책자로 공부하고 의심나는 부분은 찾아 읽으며 다른 고수익 버섯품종도 찾아보았다. 표고 전업농이 되기 위해서는 3만본 정도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원목을 살 수 있는 거래처를 확보하고 급수 설비 등 시설에 대한 투자를 위해서는 토지 비용 제외하고 연 5000만원 정도 자금이 필요하다.
현재 실험적으로 재배하는 표고는 한 해에 200본씩 확보하여 5년 정도 지나면 1000본정도 되고 그 중 800본 정도가 수확된다. 연차적으로 농사에 필요한 40m×8m 규모의 못자리용 비닐하우스를 보조금 제외한 420만 원에 설치하고 백미 및 현미가공이 가능한 가정용정미기를 140만 원에, 비닐 피복 및 소규모 로터리 및 두둑 만들기가 가능한 아세아 관리기를 120만 원에 구입하는 등 최소 규모의 투자도 진행 중이다.
◇직장과 농사를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 들어 남의 밑에 가서 거슬리는 말 참아가며 직장 다니지 말고 농사에 올인 하면서 편히 살라고. 그러나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직장생활과 농사를 병행할 생각이다. 또 관심 있는 금송, 장뇌삼, 블루베리, 복숭아 등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꾸면서 가능성도 따져보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낙원이라는데 직장을 정년퇴직하면 젖 짜는 산양도 두세 마리 키워서 산양유를 짜서 마시고 남으면 치즈 등 제품 개발도 해보고 싶다. 또는 벌통을 두세 통 사서 남향 따뜻한 곳에 놓고 주위의 아카시아나 밤꽃 등의 꿀도 따고 작물의 수분도 좋게 하는 일들도 좋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러 곳에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도 정리하고 내가 흙으로 돌아갈 준비도 착실하게 해 놔서 후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조상을 숭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작은 바램이다.
<이규호씨의 귀농이야기>
* 귀농 전 거주 지역: 중국 대련에서 10년 거주
* 귀농 전 직업: 생산관리
* 귀농 결심동기: 노후준비
* 귀농 선택작목: 벼, 무, 배추, 감자, 표고버섯
*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 귀농연도: 2008년
* 귀농 시 나이: 52세
*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마을
* 귀농시 영농기반: 논 4000평, 밭 1000평
* 귀농 초기자금: 없음
* 재 영농규모 : 귀농시와 동일
* 연간 수익: 논 농사 800만원, 밭 농사 450만원(감자 100만원, 무·배추 100만원, 고추 100만원, 표고버섯 150만원)합 1250만원
<자료 : 농림축산식품부 발간 귀농·귀촌 수기모음집 ‘촌에 살고 촌에 웃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