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으로 채운 해외 한달살기] “60대 청춘 꽃피다”

영어 교사로 38년간 재직한 한경신 씨. EBS FM 라디오에서 10여 년간 고교영어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은퇴 후 내린 뜻밖의 선택은 ‘미국 대학생 되기’였다. 평생 영어를 가르쳐온 선생님이 영어권 국가에서 다시 학생이 된 것이다. 먼 타국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어울린 시간은 그에게 새로운 자신감과 일상의 활력을 안겼다.

“60대, 겁날 것 없는 나이 아닙니까?”
은퇴 후 2년여가 지나자 인생이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한 씨. 그때 대학 졸업 무렵 품었던 오랜 꿈이 떠올랐다. ‘60세가 넘으면 다시 대학에 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 그는 겁날 것 없는 지금이 그 계획을 실행할 때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영어를 쓸 때 즐겁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영어로 이야기하면 “머리에 엔도르핀이 도는 느낌”이 들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못 할 것도 없잖아’라는 생각은 결국 미국행으로 이어졌다.
한 씨가 선택한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시티칼리지였다. 비교적 온화한 날씨와 개방적인 분위기의 미국 서부에서 공부하고 싶었고, 인근에 버클리대학교가 있다는 점도 마음을 끌었다. 입학 마감을 앞두고 급하게 준비를 시작했지만 건강검진서와 대학 졸업증명서 등 필요한 서류를 영문으로 빠르게 발급받을 수 있었다.

20대와 ‘계급장 떼고’ 공부하다
2019년 1월 시작한 유학 생활은 2020년 5월 말까지 이어졌다. 당초 2년을 계획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예정보다 일찍 귀국했다. 수업은 평소 관심 있던 분야를 중심으로 골랐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과목은 ‘죽음의 사회학’이었다. 문화에 따라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부터 안락사, 르완다 내전과 집단학살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서양 현대미술사’와 ‘비디오 컬처와 이미지 분석’도 즐겁게 들었다. 미국 현지에서 공부하며 K-컬처를 향한 관심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20세기 미국 현대음악 수업에서 학생들이 10분씩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저는 포르테 디 콰트로, 미라클라스, 포레스텔라 등 한국의 크로스오버 그룹을 소개했어요. K-팝이 BTS만 있는 게 아니라 굉장히 폭넓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반응도 굉장히 좋았죠. 그리고 ‘아시아컬처클럽’ 활동도 했는데, 거기서 한국말도 가르쳐주고 한국 드라마도 같이 봤어요. 아시아 학생들이 한국 문화에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그래서 저한테 더 잘해줬던 것 같아요.”
영어를 오랫동안 가르쳐왔지만 현지에서 다시 학생으로 공부하는 일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한 씨는 오랜만에 영어로 수업을 듣는 데다 젊은 학생들의 말이 유독 빠르게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3~4개월 지나자 자연스럽게 적응했다. 오히려 나이가 공부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제가 그동안의 인생 경험이 있어서인지 젊은 친구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고, 더 넓고 깊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을 사회학 공부를 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무엇보다 값진 경험은 세대가 다른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하며 교류한 것이었다. 출국 전 남편은 그에게 “가서 젊은 친구들 많이 만나고 오라”고 했다. 실제 20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어울리는 시간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한국에서 60대 중반에 미국에 가서 공부한다고 하면 ‘대단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서는 아무도 제 나이를 신경 쓰지 않았어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어떤 문화에서 살아왔는지에 더 관심이 많았죠. 그야말로 계급장 떼고 생활하는 것, 그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나이 때문에 너무 늦었다는 건 없어요”
귀국 후 에세이 ‘60대 청춘의 미국 유학기’도 펴낸 한경신 씨. 그에게 미국 유학은 젊은 세대와 나이의 경계를 허물고 어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외연수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앞으로 오래도록 반추하면서 살아갈 아름다운 추억이 생겼다”고 말했다.
해외연수를 고민하는 시니어에게 한 씨가 가장 먼저 권하는 준비는 언어다. 비용 역시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특히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는 주거비를 비롯한 생활비 부담이 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한 씨가 50대에 접어들며 마음에 품어온 문장이 있다. “The best days of my life are still in the days to come.” 우리말로 옮기면 ‘내 인생 최고의 날들은 아직 오지 않은 날들 중에 있다’는 뜻이다. 60대에 미국 대학생이 됐던 한 씨는 이제 고희를 넘겼다. 앞으로의 날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배움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이 때문에 너무 늦었다는 건 인생에 없다고 생각해요. 해외연수라고 해서 꼭 저처럼 대학에 갈 필요도 없어요. 요즘에는 한 달 정도 머물며 공부하고 여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잖아요.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하면 됩니다. 저도 이제 새로운 목표나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현재를 충실하게 살려고 합니다.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생각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요.”
관련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