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 답사기] 수도권에서 3~4시간 거리, 자연이 숨 쉬는 땅
조금 멀리 떠나보자. 기대가 무르익는다. 여름이 한창인 그 먼 곳에서는 어떤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수도권에서 자동차나 대중교통으로 쉬지 않고 달리면 3~4시간 걸리지만, 거창이란 지역명은 가깝지 않다. 수도권에서 출발하면 무수한 시와 도를 경유하는 느낌부터 설렘이 가득하다.

경남 거창은 오래된 자연이 숨 쉬는 땅이다. 큰 도시는 아니어도 그 안에 보석처럼 진귀한 명소가 숨어 있다. 막상 거창 안으로 들어서면 가보고 싶은 곳들이 멀지 않은 거리에 대부분 자리 잡고 있어 다니기가 수월하다. 거창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수승대를 비롯해 수백 년 수령의 나무들이 서늘하게 숲을 이룬 갈계숲, 양반 고을 집성촌의 종택 등이 모두 가깝다. 그래서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너른 들판의 수변 생태정원에 먼저 들를 참으로 거창 IC에서 창포원 쪽으로 달렸다.

일상의 자연이 정원으로 들어오다, 거창창포원
길을 나서면 반기는 것은 풀꽃이고 줄지어 선 나무들이다. 이 땅에 뿌리내린 채 자연 그대로의 색감으로 지나는 이들에게 청량제 역할을 한다. 거창창포원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군락을 이룬 꽃과 나무들이 맞아주는 수변 생태정원이다. 거창군 남상면의 창포원은 정원이라 하기엔 넓이가 어마어마하다. 축구장 66배 크기라 하니 압도적인 규모다. 1988년 합천댐 조성 당시 수몰 지역으로, 그동안 지역민들이 벼를 재배하던 곳이 대규모 생태정원으로 거듭났다.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사계절의 자연이 모두 들어온 대지라는 것을 잘 모른다. 초입의 잘 갖추어진 편의시설과 대여 시스템, 열대식물원 등을 볼 때 잘 관리된 공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조금씩 걸을수록 정원이 아닌 어느 마을의 들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얼마쯤 걸었을까. 절정을 지나고 있는 장미원과 연꽃, 수선화, 작약, 꽃창포 등이 온 땅을 점령한 채 여기저기 정신없이 가득 피어나 아찔하다. 꽃길 옆으로 조붓한 논둑길을 건너면 끝이 보이지 않는 포플러 가로수가 길게 줄지어 있다. 누군가의 아득한 유년기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산업화 초기 시절에는 아스팔트 도로가 드물었다. 그 옛날 신작로라 하던 그 길에는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걸어갔고 버스가 먼지 날리며 내빼듯 지나갔다. 포플러 나무들은 오랫동안 그런 풍경을 온몸으로 담으며 지금껏 생명력을 이어왔을 것이다. ‘아! 그래… 이걸 보기 위해 새벽 댓바람에 달려왔구나.’ 아릿함이 솟구친다. 비로소 아주 멀리 뚝 떨어져 나온 기분이 든다. 포플러 가로수 아래 자잘한 들꽃들이 가끔 부는 바람에 한들거린다. 그 길에 서서 한 움큼이나 흘러가 버린 시간의 그리움보다는 지금 여기 와서 오늘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두 개의 너른 연못 사이로 조성된 버드나무길로 접어든다. 걷다 보면 땅에 닿을 듯 축 늘어진 버드나무 줄기가 바람에 날리면서 살짝 간질인다. 산책하기 그만이다. 사람 손길이 덜 탄 듯한 자연주의 정원 쉼터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린다. 여기서는 서두를 일 없이 느긋하게 자연을 누려야 제맛이다.
창포원의 길은 어디서든 계속 이어진다. 유수지와 습지를 지나고 그냥 시골 마을 길을 걷는 기분이다. 이 지역의 들판과 마을의 개울이 창포원으로 들어왔다. 길고 너른 하천은 정원 안에서 유유히 흘러간다. 흐르는 물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절로 힐링된다. 넓다 보니 한적한 시골길을 가듯 자전거 타고 둑방을 따라 하이킹을 즐겨도 좋다. 오래 걷기가 여의치 않다면 정원 내 이동 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창포원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자연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정원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려면 하루가 모자랄 판이다.

예나 지금이나 거창의 명승, 수승대
자연 속에 푹 파묻혀 꽃을 먼저 보고 나니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정화된 기분으로 길을 떠나 수승대로 간다. 수승대는 두말할 것 없이 거창의 명소다. 거창의 무릉도원이라 해도 뭐라 할 사람 없는 청정 계곡이다. 그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이곳에 사신을 보낼 때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해서 근심 수(愁)와 보낼 송(送)을 써서 원래는 수송대(愁送臺)였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광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주어 ‘근심을 잊을 만큼 빼어나다’는 뜻의 수승대(搜勝臺)로 바꿨다고 전한다.
수승대 계곡을 따라 걸으면서 먼저 구연서원과 관수루를 만난다. 구연서원의 정문인 관수루는 목조건물 맨 아래층 휘어진 기둥이 나뭇결 그대로의 멋을 살린 채 받치고 있다. 1540년(중종 35년) 조선 전기 학자 신권이 은거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구연서원이다. 서원 옆 계곡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의 거북바위 벽면에 소나무가 자라고, 퇴계 이황과 임훈의 화답 시가 새겨진 게 보인다. 빼곡히 새겨진 옛 선인들의 글씨가 일일이 읽어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서원 건너편 계곡 위의 요수정(樂水停)을 살펴볼 만하다. 구연교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요수정은 500여 년 전쯤 신권이 풍수를 즐기며 강학했던 곳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정자와 특이하게 다른 점은 자연 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사용했고, 사방으로 난간을 두르고 중심에 방 한 칸을 둔 것이다. 추운 산간 지역의 기후를 고려해 정자 내부에 방을 들인 지역적 특성이 잘 반영된 거창의 대표적인 건축 문화재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하던 신권의 삶과 풍류의 멋스러움이 깃든 요수정이다.
수승대 앞 너럭바위를 들여다보자. 바위의 웅덩이 크기에 따라 붓을 씻거나 술을 담기도 했다는데, 신권이 유생들에게 상으로 곡주 한 잔씩 내리기도 했던 곳이다. 풍류 넘치는 강학의 장소에서 배우 송혜교와 조인성이 드라마 촬영도 했다. 더운 날이면 옛 선인들이 탁족을 즐기던 피서지로, 지금도 여름이면 사람들이 찾는 계곡이다. 수승대는 잘 보존되고 있는 옛 명소답게 주변에 고란초 등의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어딜 돌아봐도 옛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고, 주변의 자연이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숲, 갈계숲
거창에는 오래된 숲이 여러 군데 있다. 수승대에서 5분 남짓 거리의 갈계숲을 빠뜨릴 수 없다. 북상면의 갈계숲은 북상 13경 가운데 제3경이다.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된 갈계숲은 왜가리 도래지이기도 하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물이 갈계마을에 이르러 자연 섬이 형성된 약 2만m²의 숲이다. 대부분 200~300년 수령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울울창창하다. 숲 이름은 조선 명종 때 거창 출신 문신 임훈의 호인 갈천에서 비롯되었다. 후손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면서 숲속에 건립한 가선정과 몇 개의 고풍스러운 유적들이 오래된 숲에 스미듯 어울린다. 한적한 숲길을 따라 가끔 마을 사람들이 뛰거나 걸으며 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토록 멋진 숲이 마을 사람들에겐 일상의 산책 공간이다.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숲에 가을이 시작되면 꽃무릇이 화려하고 절정의 단풍 숲은 탄성을 부른다.
거창 문화유산, 동계 종택
수승대와 갈계숲, 그리고 동계 종택은 거리가 가까워서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는 코스다. 어디든 유행처럼 생겨난 출렁다리와 캠핑장도 부근에 있다. 조선 후기 양반 주택의 학술적 가치를 지닌 동계 종택. 덕유산 남쪽 끝 금원산 아랫마을인 위천면의 동계 종택은 거창 문화유산 트레킹 코스이기도 해서 걷다가 들르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눈썹지붕의 누마루 아래 하얀 고무신이 단정하다. 여전히 정갈하게 보존되고 있는 고택 마당엔 수북하게 자란 풀이 자연스럽다. 동계 종택은 개방된 문화재다. 대문채와 중문채 사이 마당의 왼편 가옥은 고택 스테이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