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끝을 기억하는 자만이 오늘을 산다

15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죽음과 구두쇠’(1490~1516) 속 남자는 죽음 앞 인간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사신이 눈앞에 서 있고, 천사가 십자가를 가리키는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돈주머니에 머물러 있다. 쇠약해진 몸으로 이미 삶의 끝에 와 있으면서도 그는 끝내 재물을 놓지 못한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장면은 전혀 낯설지 않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죽음과 삶’(1910~1915)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화려한 색채 속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죽음의 사신이 이미 곁에 와 있지만, 대부분은 눈을 돌린 채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 사신을 똑바로 응시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많은 연인을 두어 ‘비엔나의 카사노바’라 불리며 찬란한 생명과 여성의 관능을 그린 화가가 왜 이런 작품을 남겼을까. 뇌출혈로 인한 아버지와 남동생의 연이은 죽음이 그를 바꾸었다. 상실을 통해 비로소 삶의 본질을 묻게 된 화가의 시선이 이 그림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대가 달라도 인간의 선택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대수명 100세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웰다잉’은 문화센터 강좌 제목, 베스트셀러 부제, 지자체 복지 프로그램 등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당연해진 이 시대에, 정작 중요한 질문은 외면받고 있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서고, 먹고, 걸을 수 있는 시간보다 누군가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몇 해 전 동네 복지관에 웰다잉 강의를 제안하며 관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취지에 공감한다면서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요청하는 강의는 재테크와 건강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건강도 꾸준한 운동보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시술과 성형에 관심이 많다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웰다잉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죽음을 외면한다. 보스와 클림트의 그림 속 인물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죽음에 제대로 대비할 수 있을까.

첫째,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고대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의 행렬 뒤에 포로가 된 노예를 세워 “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치게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누리는 영광이 영원하지 않으며, 인간의 운명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경고였다. 역설적으로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삶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비로소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둘째, 관계 부자, 근육 부자가 돼야 한다
나이 들수록 삶을 지탱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이다. 직장을 중심으로 관계를 쌓아온 많은 이들이 은퇴 이후 급속히 고립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장년 남성(특히 50~60대)의 고독사 비율이 가장 높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공감과 배려가 살아 있는 관계망,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근육. 이 두 가지가 노년의 진짜 자산이다.

셋째, 미뤄둔 말을 꺼내야 한다
랠프 왈도 에머슨은 “진정한 성공이란…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는 것”이라 말했다. 인간이 마지막에 후회하는 것은 더 많은 돈이나 더 높은 성취가 아니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용서한다”는 말, 바로 그 말을 미룬 시간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만이 오늘을 진정으로 살아낼 수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온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돈주머니를 놓지 못한 채 눈을 감을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 나의 삶을 바꿀 것인가. 웰다잉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기술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완성하는 태도다.
죽음을 직시할 때 인간은 탐욕에서 벗어나, 오늘 이 자리의 삶을 더 촘촘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그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는 것. 그것이 잘 사는 것이며, 결국 잘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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