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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佛千塔 이야기 ⑧ 서산 보원사(普願寺) 터

기사입력 2018-12-13 15:05

폐사지 답사의 계절, 첫 번째 이야기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내리더니 대설(大雪)을 넘어 동지(冬至)가 다가오기도 전에 매서운 추위가 들이닥쳤다. 이렇게 되면 야외활동이 많이 위축되고 문화유산 답사도 지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산과 들이 낙엽 지고 썰렁하다 못해 가슴 한가운데로 찬바람이 뚫고 지나가는 계절적 처연함이 가득한 늦가을과 초겨울이 엉겨 붙는 이때가 폐사지 답사에는 제격이다. 폐사지가 처량하면서도 아름답고 황량하면서도 존재감이 드는 것은 그곳이 한때는 번성하던 절터였기 때문이다. 말없이 우리를 대하는듯하지만 궁금한 것들은 차근차근 일러주는 미덕이 있으며 감추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보여주는 사실과 증거가 널려있다.

충남 서산 보원사 터 (사적 제31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계곡은 내포(內浦) 지방의 진산 가야산(677m) 줄기 북쪽 봉우리 상왕산(象王山) 자락을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개심사(開心寺)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산줄기 동쪽으로 깊은 계곡이 흐르는 곳이다. 지금은 국립용현자연휴양림이 있지만 그 옛날 이곳에는 100개의 절집과 1,000명이 넘는 승려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백제가 공주를 지나 부여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당진(唐津)을 통하여 중국과 왕래하던 중간지점쯤 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가 화엄 10찰이다'라고 기록되어 이즈음 창건된 사찰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는 등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는 기록을 볼 때 16세기까지 그 사세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격인 호산록(湖山錄)에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뀌었다거나 철불의 양손이 없다는 기록 등이 있어 이때부터 사세가 기울어진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때 사진에는 석조물만 남아있을 뿐 절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959년 근처에서 백제의 미소라 부르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 발견되었으며, 1968년에는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대규모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현재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으며 102,886㎡의 웅장한 규모의 절터에는 당간지주, 석조, 오층석탑, 법인국사 승탑과 탑비 등 보물 5점이 있다.

▲서산 보원사터 전경. 102,886㎡의 규모라니 실감이 나지 않아 평수로 환산하니 3만 평이 넘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폐한 벌판이었는데 지금은 발굴조사를 마친 후 구획정리가 나름 깔끔하게 되어있다.(김신묵 동년기자)
▲서산 보원사터 전경. 102,886㎡의 규모라니 실감이 나지 않아 평수로 환산하니 3만 평이 넘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폐한 벌판이었는데 지금은 발굴조사를 마친 후 구획정리가 나름 깔끔하게 되어있다.(김신묵 동년기자)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이 깃발을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깃발(幢,당)이나 깃대(幢竿,당간)는 남아있지 않지만 돌로 된 기둥(支柱,지주)만 남아있으니 우리가 폐사지나 현존하는 절집 초입에서 자주 만나는 유적이다.

▲보물 제103호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차에서 내려 절터로 다가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데 천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방문객을 반겨주는 모습이 더없이 친근해 보인다.(김신묵 동년기자)
▲보물 제103호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차에서 내려 절터로 다가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데 천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방문객을 반겨주는 모습이 더없이 친근해 보인다.(김신묵 동년기자)

보원사 터 당간지주는 4m가 넘는 큰 석물이지만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화려한 조각 없이 밋밋해 보이지만 찬찬이 살펴보노라면 의외로 멋진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하단이 상단보다 넓어서 안정적이며 기둥 안쪽은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으로는 띠를 두르듯이 조각하였다. 윗부분은 둥글게 궁굴려서 부드럽게 마감하였으며 마주 보는 기둥의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했다. 상단의 고정 부분은 열린 형태로 파내었고, 당간 받침대는 나중에 따로 만든 듯하며 큼직한 안상을 시원스레 조각했다. 중간에는 당간을 세울 때 받치는 자리, 즉 간대(杆臺)는 옛 모습 그대로 놓여있다. 저 넓은 3만 평 넘는 부지에 절집이 번성하던 시절, 이 당간지주에 힘차게 휘날리던 화려한 깃발(幢,당)을 생각해보면 참 멋지다. 주변에 사하촌 마을까지 들어차 얼마나 번화했을까.

오층석탑 (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 중간을 횡단하여 흐르는 개울이 있다. 예전에는 징검다리로 불안하게 건너 다녔는데 최근에는 간이 철제 다리를 놓아 편리하다. 생각해보면 그 옛날 이곳에는 멋진 돌난간을 두른 큼직한 극락교나 해탈교 등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 절집 안으로 들어서면 길게 높지 않은 축대가 쌓여있다. 그 중앙에 계단이 놓여있으며 위로 올라서면 중앙에 오층석탑 하나 서 있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자태가 멋스러운 석탑은 상륜부를 치장하였던 찰주가 비죽 나와 있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한 모습이다.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안으로 들어와 바깥쪽으로 내다 본 모습으로 금당 터 앞에 하나의 석탑이 서있는 1 탑 1 금당 형식이다. 백제탑을 이어받은 충청지역 석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2단의 받침대 각 면에 화려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김신묵 동년기자)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안으로 들어와 바깥쪽으로 내다 본 모습으로 금당 터 앞에 하나의 석탑이 서있는 1 탑 1 금당 형식이다. 백제탑을 이어받은 충청지역 석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2단의 받침대 각 면에 화려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김신묵 동년기자)

▲이중기단의 아랫면은 3 등분하여 모두 열두 칸에 제각각 다른 모습의 사자 12마리를 새겼으며, 윗면은 2 등분하여 모두 여덟 칸에 팔부중상을 새겼는데 많이 마모되어 아쉽다. 그중 서쪽면에 새겨진 둘 중 오른쪽 아수라상의 모습이 비교적 또렷하다. (김신묵 동년기자)
▲이중기단의 아랫면은 3 등분하여 모두 열두 칸에 제각각 다른 모습의 사자 12마리를 새겼으며, 윗면은 2 등분하여 모두 여덟 칸에 팔부중상을 새겼는데 많이 마모되어 아쉽다. 그중 서쪽면에 새겨진 둘 중 오른쪽 아수라상의 모습이 비교적 또렷하다. (김신묵 동년기자)

기단 위에 1층 몸돌이 얹히는데 그 사이에 굄대를 올린 것이 특이하며 충청도 지역 고려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층 몸돌의 각 면에 문비를 새겼으며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어 솟아오름이 강조되지만 지붕돌이 넓고 평탄하여 안정감을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1968년 완전 해체, 복원 시 나온 부장품들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법인국사탑과 탑비 (보물 제105호, 제106호)

오층석탑 뒤로는 금당 터가 발굴되었으며 중앙에 불대좌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그 뒤로 산자락에 연하여 다소 높직한 축대가 쌓인 곳에는 법인국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법인국사 탄문 스님은 고려 4대 임금 광종(光宗)을 위한 불사에 앞장섰으며 968년에는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975년에 보원사로 돌아와 76세에 입적하였다.

▲오층석탑과 금당 터 뒤편, 산자락에 물려서 축대를 쌓고 법인국사탑과 탑비를 모셨다.(김신묵 동년기자)
▲오층석탑과 금당 터 뒤편, 산자락에 물려서 축대를 쌓고 법인국사탑과 탑비를 모셨다.(김신묵 동년기자)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탑(오른쪽)과 제106호 법인국사탑비(왼쪽).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신 팔각 원당형 승탑은 꽤 큰 규모이며 조금 작은 크기의 탑비에는 법인국사에 관한 기록이 자세히 적혀있다.(김신묵 동년기자)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탑(오른쪽)과 제106호 법인국사탑비(왼쪽).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신 팔각 원당형 승탑은 꽤 큰 규모이며 조금 작은 크기의 탑비에는 법인국사에 관한 기록이 자세히 적혀있다.(김신묵 동년기자)

스님이 타계하자 국왕은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그러면 승탑은 보승탑(寶乘塔)이라 불러야 맞는데 그냥 법인국사승탑이라 적었다. 승탑은 지대석 위의 기단부 8각 면마다 안상 모양을 파내고 그 안에 다양한 모습의 사자를 한 마리씩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중대석 받침돌은 8각이 다소 둥글게 보이는데 구름과 용무늬, 즉 운용문(雲龍紋)을 사실적으로 새겼다. 중대석은 아무 장식 없이 높고 큰 배흘림기둥이며 상대석은 연꽃무늬가 화려하고 그 위로는 난간을 조각하였다. 승탑의 몸돌은 8각의 앞뒷면에는 문비를 새겼고 나머지 6면에는 사천왕상과 알 수 없는 인물상 둘이 새겨져 있는데 설명이 아쉽다. 팔각의 지붕돌은 아깝게도 귀꽃이 많이 깨어진 상태이며 상륜부에는 연꽃을 새긴 복발 위로 보륜이 있다. 왼쪽에 세워진 탑비에는 법인국사(法印國師)가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된 후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다고 하니 비슷한 시기에 승탑도 세운 듯하다. 용 네 마리를 새긴 탑비의 이수 중앙에는 伽倻山 普願寺 故國師 制贈諡 法印三重大師之碑題額(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제증시 법인삼중대사지비)라고 제액(題額)이 씌어 있으며 비석에는 모두 4천5백여 글자를 새겼다.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

석조는 절집에서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통돌을 파내서 만드는데 보원사지 석조는 현존하는 국내 최대 크기로 약 4톤의 물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보물 제102호 서산 보원사지 석조. 절터 오른쪽으로 홀로 나앉아 있는데 이부근이 절집의 공양간이나 허드렛일 하는 공간이었던 듯하다. 얼마 전까지는 내부가 금이 가고 깨어진 모습이었는데(왼쪽) 지금은 말끔하게 수리하였다(오른쪽).(김신묵 동년기자)
▲보물 제102호 서산 보원사지 석조. 절터 오른쪽으로 홀로 나앉아 있는데 이부근이 절집의 공양간이나 허드렛일 하는 공간이었던 듯하다. 얼마 전까지는 내부가 금이 가고 깨어진 모습이었는데(왼쪽) 지금은 말끔하게 수리하였다(오른쪽).(김신묵 동년기자)

철불(鐵佛)

보원사 절터에서는 지난 1968년에 9.3cm의 자그마한 백제 금동불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경 이곳에서 출토된 철불 2구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보원사 터에서 발굴된 철불 중 하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상 전시관에 있으며 양 손은 원래 따로 만들어 붙이는데 훼손되고 없지만 그 모양으로 보아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취했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보인다. (김신묵 동년기자)
▲보원사 터에서 발굴된 철불 중 하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상 전시관에 있으며 양 손은 원래 따로 만들어 붙이는데 훼손되고 없지만 그 모양으로 보아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취했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보인다. (김신묵 동년기자)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보원사 폐사지를 둘러보고 용현계곡을 빠져나오다 보면 오른쪽 개울 건너 작은 산 중턱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국보 마애불이 있다. 1958년 한 나무꾼 제보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 마애불 중 최고로 손꼽힌다. 특히 벙글벙글 웃는 모습이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햇빛에 따라 변하는 것이 특이하다. 최고의 국보 마애불을 보러 갔다가 폐사지를 둘러보든지, 쓸쓸한 폐사지를 둘러보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국보 마애불을 만나보든지 아무튼 이 가을철에 가볼만한 답사지이다.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가운데 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바라보면서 왼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 오른쪽은 미래불인 미륵불인데 전형적인 반가사유상이다. 부분적으로 조금씩 깨어진 것이 가슴 아프다. (김신묵 동년기자)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가운데 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바라보면서 왼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 오른쪽은 미래불인 미륵불인데 전형적인 반가사유상이다. 부분적으로 조금씩 깨어진 것이 가슴 아프다. (김신묵 동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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