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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엘랑 오지 말아라”

기사입력 2018-09-11 09:48

[추석 단상]

명절이 다가오면 시아버님의 새벽 전화도 덩달아 대목을 맞이한다.

“에휴, 이번 추석엘랑 오지 말어. 뉴스 보니께 차도 많이 밀리고, 그럼 안 그렇겠어?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니께~ 느그들 왔다 가면 도착했다는 말 들을 때까지 당췌 마음이 안 놓여. 다음에 길 한가헐 때나 한 번 오든가.”

아버님의 새벽 전화는 명절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다. 길고 긴 낮 시간을 뒤로 하고 왜 그렇게 일찍 전화를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벽 전화 내용은 명절이 임박해질수록 더 강경해진다.

“절대 오지 말어라. 으른 말 듣는 거여. 고집 피워서 그래도 오면 그날 아예 다른 데로 도망가 있을란다. 알았지?”

대답은 “네, 네” 하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골로 향한다. 절대 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던 아버님이기에 역정을 내실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 아버님은 두 시간 전부터 집 밖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오느라 고생했다며 손에 든 물건도 받아주시고 연신 싱글벙글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아들

3형제가 그렇게 다 모였다. 아버님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번호부를 펼치셨다. 지인에게 연락을 하시는데, 가만히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은근슬쩍 자랑 섞인 안부를 늘어놓으신다.

“자제분들 다 오셨나? 그래유, 아휴 안 오는 게 잘한 거유, 아주 잘했네. 당췌 걱정이 되니 이럴 때는 안 오는 게 효도지유. 명절 잘 쇠시구유~ 우리는 다 왔시유~”

끊으시곤 다른 집에 또 전화를 하신다. 누가 안 왔다고 하면 “잘했다” 하시고는 그 끝에는 꼭 “우리는 다 왔시유~”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언젠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막내동서가 아버님 전화를 곧이곧대로 믿고 안 온 적이 있었다. 일주일을 끊임없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그래야 되나보다 하고 오지 않았던 것. 결국 막내 부부는 명절이 끝날 때까지 아버님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하나가 안 오니 집 안이 텅 빈 것 같다” 하시며 명절 연휴 내내 동서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시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을 테다.

이만하면 우리가 아버님 말씀의 속뜻을 모를 리 만무하다. 이제는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셔도 다들 알아채고 잘 찾아온다. 가족들이 다 모이면 가문과 예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아버님은 어린 손주들을 빙 둘러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여자들이 부침개를 하는 마루까지 아버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렴풋하게나마 옛이야기가 돌고 도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 덕분일 것이다. 어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른바 구전문학과 다름없으니, 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일인가. 요즘 사람들 입장에서는 갓 쓰고 자전거 타는 식이겠지만, 달리 보면 이런 보물 상자가 또 없을 것이다.

어린 손주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시고 새벽 전화로 속마음을 달리 알리시던 아버님은 어느덧 95세가 넘으셨다. 한때 세월 따라 이야기보따리를 펼치며 입담을 뽐내던 명절 풍경은 손주들이 장성하며 점점 사라졌다. 그러나 명절을 알리는 아버님의 새벽 전화는 여전히 예상을 뛰어넘지 않는다.

“이번 추석엘랑 당췌 오지 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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