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제 갈 곳으로 나간 후의 현관에 서서 이리저리 흩어진 신발들을 정리한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네 명이건만 좁은 현관에 신발들이 가득 차 있으니 볼 때마다 정리하지 않으면 가히 잔칫집 현관이다. 특히 작은아들은 매일 입는 옷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신발 때문에 갖가지 구두와 운동화들이 현관과 신발장으로 들락인다. 내가 현관 신발정리를 자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다행히 큰아이는 한두 켤레로 해결되기에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남편의 신발이 하나 더 늘었다. 출근할 때 신는 구두 두세 켤레와 운동이나 산책 나갈 때 신는 운동화가 전부였는데 낡아서 바꾸자 해놓고 미루고 미루다 최근 새 운동화를 샀다. 헌것은 버리자 했더니 비가 올 때 질척한 산길을 걸을 때 딱이라며 그냥 두라고 한다. 새로 장만한 운동화가 현관에 얌전히 놓여 있다.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애잔하다.
새 운동화가 마음에 드는지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신고 다닌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다. 작은아들은 패션에 따라 바꿔 신는 고가의 운동화와 구두가 신발장에 넘쳐난다. 그런데 아들 운동화 반값도 안 되는 운동화 하나 겨우 사 신고 좋아라 하는 것이다. 물욕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남편은 물건을 살 때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어야 구입한다. 본인을 위한 지출은 여간해서 하질 않는다. 그래서 가끔씩 답답할 때도 있는데 그 모습에서 가장의 무게도 느껴지고 그럴 때마다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남편의 양복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경기가 좋으면 아이들 옷, 자기 옷, 애견용품, 그다음으로 남편 옷을 산다는 내용이 있었다. 가장이라는 존재는 가족들을 뒷받침해주는 넉넉함이 DNA로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염치없이 해본다. 한 가정의 우선순위에서 스스로 밀려난 이 땅의 남편들이다. 그 가장의 모습을 오늘 아침 남편의 운동화에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