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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 배수구에 마개가 빠진 날

기사입력 2017-12-18 08:57

▲동네 아울렛 백화점(박미령 동년기자)
▲동네 아울렛 백화점(박미령 동년기자)
집 가까이 전통시장이 있다. 원래 시장이라고 부르던 것이 언젠가부터 앞에 전통이란 단어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잘 있는 시장을 갑자기 우대하여 높여 부르는 건지 아니면 이제 퇴물이 되었다는 건지 아리송하지만, 아무튼 시장이 근처에 있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 신선한 채소를 싸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물건값 에누리하는 즐거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느껴지는 활력이 좋다. 처음엔 상인들의 소란스러운 호객행위가 귀에 거슬렸지만, 익숙해지자 그마저도 정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외출했다 귀가할 때면 일부러 길을 돌아 200m 넘는 시장 골목을 거쳐 오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사실 시장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물건이 많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2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시장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할 만큼 다양하다.

요즘에 흥미를 느끼며 돌아보는 가게는 정체는 불분명하지만, 꽤 큰 규모의 잡화상이다. 대개 없는 물건 빼곤 다 있다. 주방용품, 조명기기, 국소 세탁 용품, 하수구 막힌 것 뚫는 기구, 심지어 남편 코털 깎기까지 수없이 많은 물건이 쌓여 있다. 그렇다! 바로 옛날 만물상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던 필수품이 얼마나 많던가. 툭하면 통째로 버리고 새로 사는 세태에 이 얼마나 신선한 발견인가.

주말 아침에 욕실에서 딸이 소리쳤다. “엄마! 세면대 물이 안 내려가!” “아침부터 웬 호들갑이니.” 하며 욕실 문을 여니 딸이 세수하다 말고 돌아본다. 과연 세면대가 밀물로 부푼 해변처럼 비눗물로 가득하다. 아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작은 일이지만, 세면대가 막히면 얼마나 불편해질까. 마치 변비가 온 것처럼 온몸이 갑갑해졌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바로 우리 집의 맥가이버인 남편이 소환된다.

남편은 뭐 별일 아니라는 듯 만물상에서 산 일명 ‘뚜러’를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등장한다. 이 ‘뚜러’는 아무 장식 없는 검은 색의 볼품없는 플라스틱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무척 요긴한 물건이다. 남편은 세면대의 고인 물속에다 들이대고 가차 없이 펌프질을 해대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아무리 길어도 30초 정도면 해결되었는데 1분이 지나도 해결될 기미가 없다.

“도대체 무얼 빠뜨린 거야? 이건 그냥 막힌 게 아닌데?” 물리적인 공격이 막힌 남편은 은근히 승부욕이 불타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엔 화학적인 공격으로 전환한다. 역시 도구는 만물상에서 산 액체다. 일명 ‘뻥뚜러’인데 웬만한 막힘에는 만병통치였다. 남편은 세면대의 물을 바가지로 퍼낸 후 하나 가득 화학 액체를 쏟아부었다. 성분은 정확히 모르지만, 뭐든 녹일 듯이 자신만만하게 일렁인다.

그러나 아쉽게 화공도 실패로 돌아갔다. 반나절을 기다려도 성과가 없자 남편도 인내심을 잃었다. “아니 도대체 무얼 빠트린 거야?”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있던 고무 재질의 작은 마개가 사라졌다. “그러면 그렇지 그게 녹을 리가 없지.” 잠시 생각하던 남편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등장한 남편은 진지한 외과 의사 표정을 지으며 기다란 줄을 세면대 배수구에 꽂는다.

드디어 그렇게 완고하던 세면대의 물은 맥없이 스르르 빠져버렸다. 남편은 득의만만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물리적 공격도 실패하고 화공도 먹히지 않더니 외과 시술로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었다. “역시 만물상이로군.” 한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만물상이다. 기사를 불러 세면대를 통째로 바꿀 뻔했던 이 날의 해프닝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아울러 스러져가던 재래시장 만물상의 위력이 새삼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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