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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손주에게 손편지

기사입력 2017-11-03 14:33

▲세 손주들과 즐거운 가족여행 (백외섭 동년기자)
▲세 손주들과 즐거운 가족여행 (백외섭 동년기자)
쌍둥이 손녀·손자와 외손자 세 손주에게 처음으로 손편지를 썼다. 편지를 잊고 반세기 가까이 살았다. 아니다. 날마다 편지를 더 많이 썼는지 모른다. 어떤 날은 자판을 두드려서 수십 통을 거뜬히 채웠다. 문명의 발달로 치부하지만 참 이유는 게으름 탓이 아닐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생각만 머리를 맴돌았다. 며칠 동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였다. 지난 10년 가까이 아이들과 무엇을 하였는가. 앞으로 손주들과 더 즐겁게 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야겠다.

예쁜 율아!

‘할아버지, 왜 헤벌쭉했어?’ 얼마 전 학교 가는 길에서 만나는 이웃 학부형과 여느 때처럼 인사 나누는 할아버지에게 네가 말하였지. 처음에는 ‘헤벌쭉’이 무슨 말인지 몰랐단다.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했지 않아!’ 책을 좋아하는 너는 궁금한 점을 종종 질문하곤 하였지.

요즘 헤벌쭉 이야기를 자주 하는구나. 시원한 정답은 자라면서 배운단다. ‘우리 율이 많이 자랐구나!’ 할아버지는 속으로 매우 기쁘단다. 앞만 보고 걸을 수 있는 마술안경을 사달라고 너에게 말했었지.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내일 아침 학교에 갈 때 너의 이야기를 듣자.

율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씩씩한 언아!

할아버지와 씨름할 때마다 재미있지. ‘할아버지, 아빠하고 씨름하면 누가 이겨요?’ 작년 이맘때 네가 물었었지. 그야 할아버지가 당연히 이긴다고 대답했었다. ‘이상하다. 아빠가 저를 이기는데 할아버지가 왜 저한테 져요?’ 너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를 썼다.

올해 2학년이 되어 훌쩍 자라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너는 건강상태가 좋을 때 씨름을 더 잘하더구나. 할아버지를 이길 때마다 기분이 좋지. 한판이라도 지고나면 이길 때까지 다시 덤벼드는 너의 모습에 기분이 좋단다. 할아버지도 이기도록 연습할 거야. 내일 아침에 씨름 한판 꼭 하자.

언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튼튼한 수민아!

올해 자주 못 만나서 더 많이 보고 싶다. 지난 어버이날 만들기를 좋아하는 네가 종이를 오리고 붙여서 만든 카드에 대문짝만큼 크게 ‘외할아버지 사랑해요’ 라고 썼었지. 지금 꺼내서 보니 너를 만난 것처럼 매우 기쁘구나. 율이 누나, 언이 형과 만나서 장난감, 카드놀이하면서 재미있게 놀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지난 여름방학 때 너하고 두 밤 같이 잤던 생각이 난다. 모기가 다른 사람은 물지 않고 왜 너만 물었을까. 퉁퉁 부었던 네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이번에는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할게. 추석에 만나 꼭 안고 자자.

수민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봉투에 이름과 주소를 정성껏 써서 우체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 제대 후 처음 편지 발송이다. 편지 세통의 우표 값이 900원이다. 그 때 우표 값은 모른다. 군사우편은 무료였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한편의 기록영화가 되어 뚜렷하게 떠올랐다. 3년 복무 병장월급 1200원, 초코파이 1통 1000원, 5개 들이 컴 1통 10원이었다. 새파랗던 그 시절이 그립다. 콧등이 시큰해졌다.

아름다운 인생이다. 오롯이 사랑하는 손주들 덕분이다. 며칠 후 할아버지의 손편지를 받으면 이 녀석들 표정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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