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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일 때 보이는 것

기사입력 2017-06-09 14:41

요새는 거울을 잘 안 보게 된다. 흐릿해서 안경을 써야 하는데 그런 절차가 번거로워 그런 것 같다.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석촌호수를 걸었다. 안 보는 사이 호수는 근사하게 변해 있었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분수를 만끽하며 걷는 길은 숲처럼 신선했다. 점점 깨끗하고 여유롭게 변해가는 서울 거리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친구와는 50년이 넘는 사이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겨울밤에는 군고구마를, 여름이면 찐 옥수수를 함께 먹으며 지냈다. 헤어지기가 싫어 서로 바래다주기를 세 번씩 한 날도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밝은 햇빛 아래서 나를 보더니 “얼굴에 뭐가 많이 났네” 했다. 얼마 전 외제 샴푸와 샤워 젤을 선물로 받았는데 며칠 전에 사용하려고 포장을 뜯어 샤워실 선반에 나란히 뒀다. 두 용기의 색깔은 거의 비슷했다. 게다가 사용법이 프랑스어로 쓰여 있어서 목욕탕의 침침한 불빛 속에서 샴푸라는 단어만 보고 구분해서 사용했다. 그렇게 일주일 이상 사용했는데 어느 날부터 얼굴에 불긋불긋한 것이 돋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목에까지 조짐이 보였다. 이상하다 싶어 돋보기를 쓰고 자세히 보니 이제까지 샤워 젤인 줄 알고 쓴 것이 샴푸였다.

친구는 내 얘기를 듣고 자기도 오늘 남편에게 한 말이 있다고 했다.

“당신 부인 눈이 안 보여서 티셔츠도 뒤집어 입고 있어.”

같이 웃었다. 요즘은 설거지할 때도 요리를 할 때도 안경을 쓴다.

얼마 전 친구가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친구가 안과에서 안약을 처방받았는데 집에 와서 화장대 위에 두고 사용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자려고 안약을 짜서 눈에 넣었다. 양쪽 다. 그런데 눈이 딱 붙어버리며 심한 통증이 왔다. 안약과 비슷한 용기에 있는 강력접착제를 눈에 짜 넣은 것이다. 접착제도 액체이고 색깔도 투명해서 분간이 안 갔다고 한다.

급하게 응급실로 실려갔다. 속눈썹과 눈꺼풀이 모두 붙어버렸고 통증은 심했다. 응급실에서 대기하는 시간 동안 공포에 휩싸였다. ‘실명하면 가족들이 날 보살펴줄까? 아님 버림받게 될까? 남편은 날 여전히 사랑해줄까?’ 응급실에서 남편에게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해달라고. 의사가 치료를 시작하며 실명할 수도 있다고 했다. 강력접착제가 혈관을 다 차단하면 위험하다고 해서 극도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친구는 잘못을 회개하고 기도했다.

다행히 접착제는 다 제거되었고 눈은 며칠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눈이 안 보이고 치료하는 동안 가족이 보여준 사랑은 친구가 가졌던 공포와 불안을 밀어내주었다. 이제 점점 나빠지는 곳이 늘어날 것이다. 정신까지 무너지면 정말 노인이 되는 것이다. 사는 동안 불안 없이 Y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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