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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한송이의 꽃처럼

기사입력 2017-03-08 11:25

딸이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연애를 하고 있는 게 티가 났다. 말갛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늘 환히 웃고 있었고 발걸음도 달 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필자와 눈이 마주치면 커다란 꽃다발을 삐쭉 내밀어 보이고는 자기 방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은은한 핑크빛 장미나 카네이션 혹은 이름을 댈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꽃들이 고급스런 포장지에 쌓여있었다.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꽃들이었다. ‘첫만남’ ‘꽃향기처럼 달콤한 사랑을 원해’ ‘100일’ 꽃다발에 담겨있을 의미를 혼자서 상상해 보다가 남편과 데이트 하던 때가 떠올랐다

남편은 만날 때 마다 책을 선물했다. 책들은 충무서적이라는 글자가 수없이 새겨진 포장지에 쌓여있었다. 남편이 서점에 들어가 이청준의 책을 고르는 장면에 감사하면서 300원 짜리 삼중당 문고로만 가득하던 가난한 책꽂이를 채워 나갔다.

키다리 아저씨 같던 남편은 무엇이든 주려고 했다. 월급날이면 백화점에서 리바이스 청바지를 사고, 명동거리를 거닐며 탠디나 소다 같은 구둣방을 기웃거렸다. 대학생이던 필자는 더 이상 떡볶이나 만두를 먹지 않아도 되고, 서점에 가서도 돈 걱정 없이 서 너 권의 책을 고를 수 있는 남편과의 데이트가 행복했다. 시계가 없는 내 손목에 일제 시계를 채워준 것도, 텅 빈 지갑에 빳빳한 수표를 꽂아 준 것도 남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참 쉬운 방법을 모르는 듯 했다.

“나도 꽃다발 받아보고 싶은데~”

하고 투정을 부리면 남편은

“고기 사줄게”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세상 모든 것을 내게 주려 애썼던 남편이었지만 꽃 선물은 어색해 했다. 그런 탓에 풍성한 꽃다발을 안은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웠다. 결국 꽃다발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 조차 잊고 살았다.

딸이 꽃다발을 받아오면 필자는 아름다운 꽃들의 싱싱함을 하루라도 더 유지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포장지를 풀어 알맞은 크기의 화병을 골라 꽃을 꽂았다. 싱싱함을 잃기 시작하면 종류대로 분류해 말렸다. 잘 마른 꽃을 다시 화병에 꽂는 것도 온전히 필자 몫이었다.

‘500일 추억이 당신과 함께여서 감사하고 행복해요’ 라는 메모가 담긴 어여쁜 꽃을 받은 딸은 이제 곧 결혼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 같은 사랑 앞에서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할지, 그들에게 세상은 꽃이고, 꽃은 향기로운 사랑일 것이다. 필자는 그 향기롭고 아름다운 사랑을 응원한다.

아름다운 한 송이의 커다란 꽃처럼

세계는 향기롭고 찬란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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