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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형제들의 우애

기사입력 2016-10-11 12:59

▲그리운 형제들의 우애(양복희 동년기자)
▲그리운 형제들의 우애(양복희 동년기자)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자손들은 하얀색, 검은색 상복을 입고 마지막 예의를 갖췄다. 수십 년 전 욕심이 한계를 넘던 어느 날의 이야기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또 살기 위해 끼니를 기다렸다. 김이 퐁퐁 나고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을 보자 눈을 크게 굴려가며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어머님을 보내드리는 고된 일정에 온 가족들은 허기가 진 모양이었다. 입고 있는 상복에도 살금살금 음식 냄새가 배어들었다. 삶은 늘 치열한 생존전쟁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 멀쩡했던 어머님의 육신을 몇천 도의 화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생생함에 죽을 것처럼 소리쳐 몸부림치던 가족들은 다시 태연해졌다. 갑작스러운 어머님의 장례식이 얼떨결에 끝나고 수지면 신봉리 시아버님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님 앞에서 가족들 모두는 초췌하게 앉아 풀이 죽어 있었다. 칠순을 훨씬 넘긴 아버님은 어머님의 빈자리를 느끼시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이윽고 아버님이 단언하듯 조용히 자식들에게 의견을 내놓으셨다. 어머님이 오랫동안 정들이며 살다 가신 그곳, 신봉리 농장에 납골당을 짓고 후손들에게 길이 남기고 싶다고 하셨다.

경기도 신봉리 농장은 어머님과 아버님이 20여 년 동안 갈고 닦은 수천 평의 아름다운 농장이었다. 지난 시절 어머님과 함께한 가족들의 수많은 추억이 깃든 농장은 이른 새벽이면 새들의 울음소리가 아침을 알려오고, 낮이면 방문객들로 하루가 짧았고, 쏟아져 내리는 계곡물 소리는 밤마다 자장가 소리가 되어주던 곳이다.

그런데 아버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느닷없이 하얀 소복 차림의 큰형님(남편 큰형의 부인)이 벌떡 일어나 아버님의 말씀에 감히 반기를 들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아버님 돌아가시면 이 땅을 팔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말했다. 온 식구들은 깜짝 놀랐다. 있을 수 없는 돌발 상황에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황당해했다.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일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아버님은 어처구니가 없으셨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셨다. 잠시 후 아들만 둘을 둔, 가장 혈기왕성한 셋째 형이 밥상을 두들겨가며 바른말을 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냐며 딸만 둘인 큰형에게 큰 소리로 핏발을 세우며 대들었다.

큰 소리들이 오가면서 집안은 순식간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초상집 난장판의 한 장면이었다. 하얀 소복, 검은 상복을 입은 남녀 형제들의 재산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기가 막힌 막장드라마도 없었다. 6남매(4남 2녀)의 막내며느리인 필자는 가만히 밖으로 나와 한숨만 쉬었다. 누구 편도 들어줄 수 없었다. 얼마 후 아버님은 자식들이 걱정이 되는지 슬그머니 안채로 들어가셨다. 그러고는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으셨는지 불도 켜지 않은 채 아무 기척이 없으셨다.

그런데 잠시 후 아버님이 두런두런 혼잣말을 하셨다. "임자! 나도 같이 가고 싶네. 왜 당신 혼자만 갔소."라고 말하며 나지막이 흐느끼셨다. 막내며느리인 필자는 가슴이 아파 더 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밖으로 다시 나갔다. 답답한 현실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재산이 아무리 많으면 무슨 소용인가. 어머님을 방금 떠나보내신 아버님 앞에서 자식들의 아귀다툼은 너무나도 큰 불효였다.

그때 깜깜한 밤하늘에 하얀 동정의 까만 소복을 입은 어머님의 모습이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하얀 소복을 입고 또 나타나셨다. 아마도 삶과 죽음이 한순간임을 보여주고 계신듯했다. 어머니는 힘없이 손짓을 하시며 고요하게 말씀하셨다. “빈손으로 떠나가는 인생이다. 욕심 없이 그저 우애 있게 살아라.” 하시면서 멀리멀리 사라지셨다.

그날 이후 집안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재산 욕심은 병과 화를 불러왔다. 형제 우애는 물론이고 분란이 더 크게 일어나 형제들은 아예 왕래가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도 많이 흘러갔다. 이제 죽음이 코앞에 와 있는데도 피를 나눈 형제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저 피해의식 속에 사로잡혀 자기를 꼭꼭 가두고 있는 사람들 같다.

지난 시절, 순수하고 다정했던 형제들의 따뜻한 우애가 그리워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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