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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기자 칼럼] 머리 자르는 날

기사입력 2016-06-14 17:25

▲미국에서 사온 미용도구들. 아직도 이걸로 남편 머리카락 깎아준다. (양복희 동년기자)
▲미국에서 사온 미용도구들. 아직도 이걸로 남편 머리카락 깎아준다. (양복희 동년기자)
필자는 남편과 한 달에 한 번 실갱이하는 날이 있다. 바로 머리 깎는 날이다.

남편은 그날이 오면 지루하게 앉아 있을 접이 식 조그만 의자, 싹싹 갈아 보관한 날렵한 가위, 미국에서 사온 100V짜리 전기 바리 깡, 주섬주섬 주어 모은 각양각색 못 생긴 빗들, 한국의 220V에 끼우려면 다운 트렌스까지 좁아 터진 목욕탕 변기뚜껑 위에 늘어놓는다. 총 출동한 도구들은 필자의 손길을 기다린다.

백인 동네 미용실은 겁이 난다고 가기를 꺼려했다. 미국 살 때부터 화장실 한쪽 구석에서 치뤄 지던 행사가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제발 미용실 좀 가라고 해도 한 손 번쩍 들어 손 사래를 절레절레 친다. 무조건 당신이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 번쩍 들어 힘차게 한눈을 찡긋거리면 가라 앉았던 마음도 슬슬 꿈틀거려 온다.

필자는 마지 못해 무거운 몸 추슬려 무기를 찾아 놓고 다시 실갱이 전쟁터로 나갈 채비를 차린다. 어느 새 수북하게 자라버린 머리 잡초들 사이로 나이 먹어 처져버린 어깨 위에 커버를 씌운다. 넙적한 등 한 대 툭 때리고 물을 뿌려 곱게 빗질을 한다. 서툰 솜씨로 손가락 꼬물꼬물 가위질에 혼신을 다하면 등 짝에는 어느새 땀이 흘러 내린다.

허리 세워 거울을 바라보며 긴장하던 남편은 그새 고개가 꾸뻑질을 한다. 이때다 싶어 선무당 미용사는 머리 위로 한 방을 쥐어 박는다. 힘 들어 죽겠는데 잠이 오냐며 속 시원하게 또 한 방을 때려본다. 깜짝 놀라는 남편은 치사하다고 내려 앉았던 두 눈을 흘겨 뜨며 힘껏 노려 본다. 그러게 나가서 하라니까 말을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면 다소곳이 자세를 낮춰 머리를 번쩍 들어 준다. 피식 웃어 대는 초보 기술자는 오늘만큼은 대장이 따로 없다.

20분 남짓 걸려 이리 돌려 대고 저리 돌리고 하다 보면 아수라장 작품은 기막힌 새 사람으로 아무리 봐도 그럴듯하다. 어느덧 십 여 년 세월에 서툰 고수가 됐다. 최고의 손 놀림으로 덥수룩하던 노인이 머리가 청년처럼 훤 해졌다. 맘에 드냐고 물으면 거울 속으로 요리조리 돌아 보다 그냥 좋다고 한다. 며칠 있으면 또 자라는데 무슨 대수냐고 걱정 말라며 뒷 거울에 한 눈 찡긋 또 다음을 기약한다. 하얗게 쉰 머리가 싱글벙글 웃음으로 입을 쪽 내민다.

미용실 가는 게 귀찮아서 일까. 진짜 미숙한 손 맛이 좋은 걸까. 아님 마누라와 실갱이가 싫지 않은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툭툭 털어 끝내고 난 뒤 아이고 허리야 엄살 떨면 아수라장 남은 뒤처리는 완전히 그 사람 몫이 된다. 그래, 이제 한 달이나 남았다. 조금 힘은 들지만 좋다는데 또 어쩌겠는가. 혼자 지껄인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그 까짓 것 못해 주랴. 함께 늙어 가면서 오로지 등 기대고 사는 데 그 무엇은 못해주랴.

▲아들 같은 남편과 그의 아내 필자의 모습. (양복희 동년기자)
▲아들 같은 남편과 그의 아내 필자의 모습. (양복희 동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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