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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우리나라 첫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

기사입력 2015-08-07 08:58

1960년대 스포츠 팬들의 최고 인기 스타

▲1958년 제3회 도쿄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김기수의 손을 심판이 들어올리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담임선생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난다. 같은 반도국가이고 두 나라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등. 그래서 이탈리아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벤베누티(국내 스포츠 팬들에게는 애칭인 니노로 알려져 있다)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당시 세계 동급 최강이었고 외모 또한 준수해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벤베누티의 아마추어 전적은 120승 1패이고 김기수에게 진 뒤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챔피언을 지내는 등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계속 받기는 했다.

얼마 뒤인 그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보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 1938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와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를 깜짝 놀랄 경기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이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김기수를 ‘스포츠 인물 열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이겨 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중반,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한국도 세계 최고(챔피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첫 올림픽 챔피언(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은 이때로부터 10년 뒤에 나온다. 1960년대 후반, 김기수가 뻗는 주먹은 모든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4 후퇴 때 남녘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에게 자극을 받아 복싱에 입문해 1957년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주니어 웰터급에서 우승했고 곧 이어 서울 성북고로 전학해 을지로 3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에 전념했다.

그 무렵 성북고는 복싱과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수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뛰어난 복서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열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사이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88전 87승 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유일한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16강)에서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비록 올림픽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기수는 아마추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정신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은메달리스트 지용주 등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간 김기수는 1962년 12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네 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海津文雄)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벤베누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2-1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지켜볼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5만 달러가 넘는 벤베누티의 개런티를 줄 수 있었기에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나올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외환 사정이 더 나빠 축구 대표 선수들이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던 날 사진을 보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기수 옆에 있는 이방인이 눈에 띈다. 미국인 트레이너 보비 리처드다. 리처드는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도전이 확정되자 트레이너로 영입된 인물이다. 일본 프로 복싱계에서 활동하던 리처드는 뒷날의 거스 히딩크 같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었다.

김기수는 리처드의 지도를 받으며 타이틀 매치를 준비했고 15라운드 내내 왼손잡이 이점을 살리면서 포인트 위주의 작전을 펼쳐 챔피언이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히트 앤드 클린치(Hit and Clinch)’라고 표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인 지도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12월 스탠리 해링턴(미국), 1967년 10월 프레디 리틀(미국)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김기수는 1968년 5월 3차 방어전에서 산드라 마징기(이탈리아)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빼앗긴 뒤 그해 11월에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에게 판정으로 져 동양 미들급 타이틀도 내놓았다. 1969년 3월 리턴매치에서 미나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되찾았으나 그해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글러브를 벗었다. 프로 복싱 전적은 49전 45승 2무승부 2패다.

김기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가 서울 충무로에 개업한 챔피언다방은 복싱 올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소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하던 김기수는 안타깝게도 한창 나이 58세 때인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기수는 프로 데뷔 초기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한국은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획득이 기폭제가 돼 1970년대 홍수환과 유제두, 1980년대 유명우와 장정구 등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고 WBA와 WBC에 동시에 세 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프로 복싱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프로 복싱 세계 랭커가 있었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세계 랭커 서정권은 전남 순천 갑부 집안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로 1912년 태어났다.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하다 1932년 미국으로 건너가 WBC 밴텀급 6위까지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해 세계 랭커였다는 긍지로 평생을 살다 1984년 타계했다.

서정권은 16세 때 동향의 마라톤 선수 남승룡(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복서인 황을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서정권의 큰형은 두 소년이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후원하던 황을수에게 “복싱에 대한 의욕을 단념하도록 혼내 주라”고 부탁했다. 황을수의 강펀치에 이가 흔들거리자 남승룡은 글러브를 놓았으나 서정권은 오기로 버티면서 형과 황을수가 놀랄 만한 투지와 기량을 보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황을수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매진한 서정권은 일본을 석권하고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글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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