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감정을 응축하는 짧은 시, 노년에게 적합한 형식

시는 정형을 요구하지 않는다. 길고 짧음, 쉬움과 난해함을 가리지 않고, 진심 어린 언어라면 모두 시가 된다. 그 가운데 최근 시니어 세대를 중심으로 ‘짧은 시’를 향한 관심이 두드러지고 있다. 짧은 시 한 편에는 긴 세월의 삶과 정서가 응축돼 있어 오히려 장문의 시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짧은 시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는 디지털 환경의 변화였다. 스마트폰과 SNS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짧은 시가 대중과 빠르고 넓게 연결되는 창구가 마련됐다. 그러면서 주로 짧은 시를 창작하는 나태주 시인을 비롯해 유명 작가들의 시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더불어 하상욱, 유병재 등 대중적 감성을 지닌 작가들의 SNS 기반 창작 활동도 짧은 시의 대중성과 공감의 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무엇보다 시를 낯설게 느끼는 이들에게 문학의 문을 열어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문학계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짧은 시 창작 활동을 장려하고 있다. 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가 주최하고 대한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짧은 시 짓기 전국 공모전’은 2014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으며, 주어진 주제 아래 50자 이내의 시를 공모받는다. 한국시인협회는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 흐름 속에서 2023년부터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이하 ‘짧은 시 공모전’)’을 시작했다.
제1회는 대한노인회, 제2회는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와 공동 주최했으며, 주관은 문학세계사(출판사)가 맡고 있다.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며, 10행 이내의 시를 통해 노년의 유머, 풍자, 감동을 문학적으로 담아내는 데 중점을 둔다.
8500편 몰린 ‘짧은 시 공모전’
‘짧은 시 공모전’은 우리 사회에 점점 증가하는 고령 인구의 문화적 욕구를 반영하고, 세대 간 소통의 창구로 기능하기 위해 기획됐다. 주관사인 문학세계사의 김요일 이사는 “공모전의 가장 큰 목적은 시니어의 목소리가 문학을 통해 사회에 울려 퍼지게 하는 데 있다. 문학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자아실현과 사회참여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회에는 5800여 편, 2회에는 8500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됐다. 양뿐만 아니라 질적 수준도 크게 향상됐다는 평가다. 블라인드 심사로 진행됐으며, 기성 시인이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수상작을 모은 작품집 ‘꽃은 오래 머물지 않아서 아름답다’에는 대상 1편, 최우수상 1편, 우수상 10편 등 총 77편이 실렸다. 생애의 회고, 가족에 대한 기억, 소소한 일상 속 감정의 흔적 등을 절제된 언어로 담아낸 시들은 공감을 자아낸다.
공모전 본심 심사는 김종해, 나태주, 김수복 시인(한국시인협회장)이 맡았다. 세 심사위원은 수상작에 대해 “일상의 소소한 경험을 문학적으로 승화하는 능력, 유머와 지혜를 통해 노년의 어려움을 초월하는 정신적 탄력성, 그리고 짧은 형식 속에서도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응축의 미학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김수복 한국시인협회장은 문예창작과 교수로 오랜 시간 청년들을 가르쳐온 시인이다. 그는 “청년의 시가 자아의 탐색과 확장이라면, 노년의 시에는 살아온 경험과 통찰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시는 결국 자기 성찰과 자기 치유”라면서 노년의 시기에 시를 쓰면 그동안의 삶을 반추하고 여생의 의욕과 활기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왜 짧은 시인가?
우리보다 고령화가 빠른 일본에서는 어르신의 시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일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는 2001년부터 매해 ‘실버 센류’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으며, 지난해 1월에는 응모작을 엮은 책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 출간돼 화제를 모았다. ‘연상이/ 내 취향인데/ 이제 없어’, ‘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 변하는 나이’와 같은 작품은 시니어 세대의 유머와 현실감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센류(川柳)는 일본의 전통 정형시 중 하나로, 5-7-5의 총 17음절로 구성된다. 형식상으로는 하이쿠(俳句)와 동일하지만, 주제와 표현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하이쿠는 자연이나 계절감을 주제로 삼고, 계절어 사용과 정서적 여백을 중요시하는 등 엄격한 규칙을 따른다. 반면 센류는 인간 중심의 일상, 풍자, 위트 등을 주제로 하며, 표현 방식 또한 훨씬 자유롭다.
이처럼 센류는 간결한 형식 속에 삶의 감정이 녹아 있어, 시니어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유용한 장르로 평가받는다. 이는 ‘짧은 시 공모전’이 지향하는 문학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김요일 이사는 “형식적으로는 짧은 시와 센류가 유사한 부분이 있으나, 한국의 짧은 시는 철저히 한국적 정서와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창작이며, 그 안에는 시대를 관통한 서사와 감정선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시니어들은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라는 특징이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 등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시에는 그 서사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상작 가운데 김명자의 ‘찔레꽃 어머니’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현금옥의 ‘영감 생각’은 부부 관계의 변화와 노년의 애틋함을 우리 고유의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짧은 시가 노년의 삶에 유효한 이유는 형식의 특징에 있다. 김수복 협회장은 “시는 찰나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예술이다. 그 감정은 길게 지속되기보다 순간적으로 솟아오른다”면서 “찰나의 감정을 응축하는 짧은 시는 노년의 감성을 잘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고 생각을 밝혔다.
김수복 협회장 역시 노년기에 접어들어 짧은 시 창작에 집중하고 있으며, 최근 사행시집 ‘저녁의 배꼽’을 출판했다. 길 위에서 마주한 장면들, 감정의 미묘한 변화들이 네 줄의 언어로 정제되어 있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수록 서정시가 더욱 끌린다”며, “지금 한국 문학계는 다시 서정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짧은 시는 그 흐름을 타고 주목받고 있다는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짧은 시는 단순히 시의 축소판이 아니라 삶의 정수를 농축한 문학의 결정체다. 김수복 협회장은 “자신을 사랑하고, 시를 쓰고 싶다면 짧은 시는 좋은 출발점”이라며 “짧은 시를 통해 다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노년의 시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삶의 언어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