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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말기암 환자와 주치의가 라뽀(rapport)를 말하다-①

기사입력 2015-04-28 07:30

말기암 극복한 황병만씨와 국립암센터 김영우 박사

▲김영우 박사와 황병만씨가 국립암센터 산책로 벤치에서 팔씨름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 팔씨름은 오랜 인사와도 같다.
“얼마나 힘이 세졌는지 확인해 봅시다.” 김영우 박사는 황병만씨를 보자마자 덥석 손을 잡아끈다. 당장 몸 상태를 체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겨도, 기분 상하면 안 됩니다.” 물론 팔씨름의 승패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황씨는 김 박사를 이겨보려 안간힘을 쓴다.

이들은 밝은 날씨처럼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인사 대신 팔씨름으로 안부 인사를 건네는 둘의 관계가 궁금해진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팔씨름을 하는 의사와 환자

황병만씨의 몸에는 4개의 장기가 없고, 5개의 장기가 일부만 존재한다. 2003년 위암 4기, 위암으로 전이된 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대수술을 통해 위, 비장, 부신, 직장을 모두 제거했다. 소장·대장·췌장·십이지장도 일부 잘라냈다. 1%의 확률이었다. 그런데 살아났다. 그는 기적의 사나이로 불리며, 각종 방송을 누비고 있다. 암 환우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무수혈 수술의 대가인 김 박사는 2002년부터 국립암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위암 최소침습(몸에 내는 상처를 최소로 줄이는 방법) 수술을 주도하는 명의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두가 포기하려고 했던 황병만씨를 살린 점이다.

살아온 환경도, 나이도, 성격도 모든 게 다르기만 한 이 둘의 공통점. 10여 년 전, 생사가 오가는 그때를 한시도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서로가 감동이라는 생각. 이들은 완벽한 파트너로 죽마고우처럼,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팔씨름을 한바탕 벌인 뒤, 둘은 손을 꼭 부여잡는다. 녹아버린 장기를 일일이 떼어놓은 손, 고마운 손, 살아줘서 행복한 손.

“나는 죽을 수 없습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죠. 화내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데요. 특히 암 환우들에게 부탁합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본인이 만나는 의사를 믿으세요. 그리고 의사가 명환자라고 느낄 수 있게 강렬한 의지를 갖기를 소망합니다.”

말 잘 듣는 명환자

황씨는 죽을 각오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의 나이 서른셋인 1985년. 첫 아기가 아내의 뱃속에 있을 때 직장암을 판정받았다.

이곳저곳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는 동안 4기로 진행됐고, 직장과 대장의 반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고3이 된 2003년엔 위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생존율 1%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그때 운명처럼 김 박사를 만났다. 황씨는 김 박사의 말을 무조건 따랐다. 운동을 하라는 김 박사의 말에 수술이 끝나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당시 의료진이 제가 미친 줄 알고, 여기저기 연락을 하더라고요. 박사님 말대로 한 건데(웃음), 수술 후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데 바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죠. 근데 전 말 잘 듣는 명환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답니다.”

암 투병 이후에도 그의 ‘명환자 되기’ 프로젝트는 이어졌다. 김 박사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체온과 혈압, 혈당, 하루 운동량을 10년 이상 매일 기록하고 제출했다. 그는 만보걷기 운동을 하고 등산을 다니며 마라톤도 즐기게 됐다. 암 수술 이후에도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담낭절제수술도 받았지만, 문제없다는 그다.

“제 인생의 선장은 김 박사죠. 건강이 회복된 후,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그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더 열심히 뛰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두려움을 깬 수술, 타협은 없다

위암은 조기에 발견하면 완치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4기로 진단받았을 경우 말기 환자의 생존율은 극히 낮아진다. 위암 말기가 되면 이미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고 수술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항암치료를 제외하고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들 한다. 그래도 예외적 상황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그랬죠. 황병만씨는 항암치료로 몇 달간 이어가다가 그렇게 보내야 하는 환자라고. 오히려 수술을 하면 생존 가능성이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살려는 의지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내게 보인 열정을 모른 척하고 타협하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김영우 박사는 수술을 결정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이 모든 것들의 중심은 믿음으로 빚어낸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암 치료는 정상적 범위를 벗어난,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곤 한다. 이럴 땐 흔히 기적이라고 표현하지만,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확고한 의지를 가진 자의 몫이다.

“암 환자에게는 무엇보다 면역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좋은 음식이나 식품을 권하기보다는 적절한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이 향상되면 자연스럽게 치료가 더 수월해집니다. 그런데 말처럼 이를 따라와 주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황병만씨는 굉장히 예외적 인물이었죠. 10%를 요청하면 100%를 해오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김영우 박사는 황병만씨를 살려냈고, 수술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둘은 여느 연인 못지않게 따듯한 산책을 즐기곤 한다.

사망 위험이 높은 암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단단해질수록 극복의 여지가 커진다고 한다. 그 신뢰관계가 약하다면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개선이 가능한 부분이 소멸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말기 암 환자는 우울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울증 여부에 따라 치료 성과가 달라진다는 연구보고도 나온 만큼 심리적 부분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확신을 갖고 이겨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게 하는 의사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환자의 자신감 회복과 치료 순응도 향상을 위해 모든 의사가 노력하겠지만, 더 큰 범위 내에서 환자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것도 의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전적인 수술이라 할지라도, 타협하지 않도록 하는 환자의 의지 역시 중요한 부분이죠.”

▲의료소송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환자 황병만씨와 김영우 박사는 12년동안 환자와 의사와의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믿음과 책임감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한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

둘의 목표는 비슷해졌다. 대한민국 암이라고 불리는 위암을 이겨내는 희망의 불씨를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김 박사가 먼저 황씨에게 부탁을 한다.

“위암 극복을 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캠페인에 동참해주세요. 그리고 환자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계속 나서서 움직여주세요.”

그러자 황씨는 김 박사의 손을 잡고 말한다. “김 박사 가는 길이 내가 가는 길이에요. 1% 확률의 지독한 위암을 당신이 치료해 준 것처럼, 나는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암은 극복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많은 환우들이 이것을 알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는 김 박사와, 그와 동행하는 황씨는 이미 의료계에서 특별한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위암 연구 활성화를 위한 R&D 예산 확보가 중요한 시점, 그 근거가 되는 둘의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소개될 전망이다. 1%의 확률을 이겨낸 환자의 집념과 이를 넘어서게 만든 의사의 노력은 묵직한 감동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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