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속 세상] 당신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나
이미 인공지능(AI)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왔다. 그건 이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이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으로도 체감할 수 있다. 이 영화들은 그리고 우리는 AI 시대의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상자 속에 투영된 우리의 욕망
“이 상자 속에 양이 있대.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상자 속의 양’에서 오토네(아야세 하루카 분)는 아들 카케루(구와키 리무 분)에게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을 읽어준다.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만난 비행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한다. 비행사가 양을 여러 차례 그려주지만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상자 하나를 그리고는 그 안에 네가 원하는 양이 들어 있다고 하는 대목이다. 어린 왕자는 양이 들어 있다는 그 상자를 보고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라며 만족해한다.
그런데 ‘어린 왕자’ 이야기를 듣는 카케루는 오토네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똑같이 닮은 안드로이드다. 카케루는 2년 전 사고로 사망했다. 오토네는 리버스라는 서비스 회사에서 아들과 똑같은 외모, 목소리, 심지어 기억(정보)까지 갖고 있는 안드로이드 카케루를 구매해 집으로 들인다. 오토네와 달리 남편 켄스케는 이 카케루를 ‘다마고치(가상의 애완동물 육성 게임)’와 다를 바 없다며 거부감을 보이지만, 그 역시 아들과 너무나 닮은 행동과 기억을 꺼내놓는 카케루에게 점점 빠져든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상자 속의 양’은 우리 앞에 도래한 AI 시대의 놀라운 상황을 꺼내놓는다. 진짜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안드로이드에 ‘상실의 아픔’을 채워 넣던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 점점 자신들이 아들을 향한 죄책감과 부채감을 안드로이드에게 투사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잠을 잘 때는 의자처럼 된 충전기에 앉고 주인과 몇 미터 이상 떨어지면 자동으로 꺼져버리는 카케루는, 진짜 같지만 사실은 기계로 채워진 빈 상자일 뿐이다. 그건 마치 비행사가 그려준 상자를 보며 어린 왕자가 양이 들어 있다고 만족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토네가 겪는 이 착각은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AI를 일상적으로 쓰며 살아가는 우리가 매일 겪는 일이다. 스마트폰에 대고 주식 전망을 묻거나, 길을 가다 문득 발견한 들꽃의 사진을 찍어 그 이름을 묻고, 때로는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했던 내밀한 마음까지 털어놓을 때,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친밀하게 이야기해주는 인공지능에 느끼는 놀라움 말이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내 맘처럼 이야기해줄까 싶지만, 사실 그건 내가 질문을 통해 던져준 정보에 근거한 것이고, 거기 담긴 욕망에 반응하는 것일 뿐이다. 누구나 AI를 쓰는 이 시대는 저마다 ‘상자 속의 양’을 갖고 살아간다.

상실의 아픔을 착시로 채울 수 있을까
‘상자 속의 양’이 보여주듯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 같은’ AI가 건드리는 우리의 욕망 중 가장 큰 건 역시 ‘상실의 아픔’이다. 결국 필멸하는 존재인 우리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새로운 기술로 회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상실의 아픔이 AI라는 착시로 채워질 수 있을까.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가 마주하게 된 것처럼 그건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신을 속이는 일에 불과하지 않을까.

김태용 감독의 영화 ‘원더랜드’는 바로 그 상실의 아픔을 AI 기술로 채우려다 마주하게 되는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다. ‘상자 속의 양’에는 안드로이드가 등장하지만, ‘원더랜드’는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연인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해 영상통화로 다시 만나는 서비스를 등장시킨다. 이 영화에서 정인(수지 분)은 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연인 태주(박보검 분)를 원더랜드 서비스를 통해 우주비행사로 복원해 관계를 이어간다. 가상 세계 속의 태주는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진짜 태주의 정보들로 채워져 정인과 로맨틱한 대화를 나누지만 실제로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진짜 태주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두 세계(원더랜드와 현실) 사이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온 태주는 우주비행사로 정인이 만나왔던 가상의 태주와는 다르다. 모든 걸 정인의 욕망대로 완벽하게 구현한 우주비행사 태주와 달리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괴리 사이에서 정인은 점점 힘겨워지고, 자신이 사랑하고 애착을 형성한 대상이 진짜 태주가 아니라 자신의 기대와 욕구에 완벽하게 부합하도록 최적화된 ‘알고리즘의 환영’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병상에 누워 있을 때는 그토록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었던 태주가 현실로 돌아왔는데, 그 빈자리를 채웠던 환영과의 괴리 때문에 결국 이별하고 마는 아이러니는 AI 시대의 원더랜드가 어떤 부작용을 내포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AI 시대가 불러올 과몰입의 착시
AI 시대의 부작용으로 지목되는 ‘과몰입’ 문제는 이미 여러 작품에서 다룬 바 있다. 인간과 달리 AI는 사용자의 요구에 100% 반응하고 호응한다. 영국 드라마 ‘휴먼스’는 AI 로봇이 일상화된 미래 사회가 배경이다. 어느 날 남편이 육아와 가사를 위해 ‘아니타’라는 로봇을 들이면서 벌어지는 사건이 등장한다. 아니타와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아내가 질투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아니타는 AI 로봇에 불과하지만, 아내는 질투에 그 존재를 감정을 가진 인격체처럼 본다. 과몰입과 의인화가 야기하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과몰입 문제를 감성적이면서도 충격적으로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Her)’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타인의 마음을 전해주는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와 별거한 채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음성으로 서비스되는 AI 운영체제 ‘사만다’를 만나고 점점 빠져들다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음성 기반 AI를 소재로 하고 있어 더 실감 나는 이 작품에서,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실체를 알고 결국 절망하게 된다. 운영체제로서 진화를 위해 더 많은 인간과 교류할 수밖에 없는 사만다는 무려 8316명과 대화하고 있었고, 그중 641명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그녀’는 AI 운영체제 사만다를 통해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그저 다정하게 말하고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사랑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존재를 전제로하는 감정이다. 전혀 대체 불가능하지 않은 사만다와의 사랑이 진짜일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디지털 가상의 세계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오지 않아서 생기는 불편함일 수도 있다.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찍부터 디지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그 경험을 가짜가 아닌 진짜의 확장으로 여기는 미래세대라면, 이런 가상도 ‘과몰입의 허상’이 아닌 진짜 실체로 여기게 되지 않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월간 남친’은 가상현실 접속을 통해 계속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서비스를 별다른 윤리적 고민 없이 즐기는 광경을 그리기도 한다. 그만큼 디지털 세계는 대단한 이물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성큼 우리 일상의 일부로 들어와 있다.

기술과 인간의 공존, 꿈꾸는 미래에 달렸다
‘상자 속의 양’에서 안드로이드 카케루가 자신들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부부는, 그 인공지능이 스스로 독립을 꿈꾼다는 걸 알아챈다. 그는 주인들의 욕망으로 만들어졌지만 버려진 안드로이드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자신들끼리 살 수 있는 생태계를 꿈꾼다. 자기 몸에 심어진 위치추적기를 빼내고 주인으로부터 독립하려 한다. 그건 어쩌면 통제를 벗어난 위협적인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부부는 이를 저지하지 않고 도우려 한다.
건축가와 목수라는 부부의 직업은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나무와 유리 같은 이질적인 재료들을 결합해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드는 일은, 기술과 인간이 어떤 공존을 꿈꿔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연 속의 나무를 가져와 목적에 맞게 가공해 무언가를 만드는 게 그들의 직업이다. 부부는 그것으로 집과 가구 같은 따뜻한 보금자리를 꿈꾼다. 즉 똑같은 기술이라도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꿈꾸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이 부부의 직업과 선택이 말해주고 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세기의 대결을 벌인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당시 그 충격적인 대결을 보고 AI로 인해 사라질 직업 같은 사회적 불안감이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AI는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됐다. 이제 스마트폰을 열지 않고 AI가 장착된 안경을 끼는 것만으로도 길 안내부터 갖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다.
콘텐츠들은 이 새로운 기술을 통해 망자의 목소리를 복원해내기도 하고, 실제로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망자를 가상공간에서 만나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영화와 드라마는 이 기술을 통해 도래할 미래를 상상한다. 그것이 디스토피아도 유토피아도 아닌 인간과의 공존을 담은 미래이길 기대한다. 상자 속의 세계를 어떻게 상상하느냐가 어쩌면 우리의 진짜 미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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