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저하 경영자의 계약·금융거래도 효력… 실질 지배 경영자는 통제 사실상 불가능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부장은 최근 회사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수십 년간 ‘호랑이 회장’으로 불리며 회사를 이끌어 온 대표이사가 최근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반복하고 있어서다. 시장에서 이미 사라진 창업 초기 사업 모델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고집하거나, 결재까지 마친 업무를 기억하지 못한 듯 번복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회사 내부에서는 대표이사의 인지기능 저하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임원진은 물론 승계를 준비 중인 자녀도 이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문제를 쉬쉬하는 사이 잘못된 의사결정이 반복되면서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 부장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이처럼 고령 창업자나 오너 경영자의 인지장애가 기업 경영의 새로운 위험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표이사나 최대주주가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치매 증상이 시작될 경우, 문제는 개인의 건강에 그치지 않는다. 계약 체결, 금융거래, 투자 판단, 인사 결정, 주주권 행사 등 회사의 핵심 의사결정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중소기업 경영자의 고령화는 이미 통계로도 확인된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2024년 기준 중소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경영자의 평균 연령은 55세였다. 50세 이상 경영자는 70.2%, 60세 이상 경영자는 33.3%를 차지했다. 중소기업 3곳 중 1곳은 60세 이상 경영자가 이끄는 셈이다. 70세 이상만 따져도 5.4%에 달한다.
“치매 증상 의심되도 의사결정 효력 가져”
문제는 경영자의 인지기능 저하가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기억력 저하나 판단 지연 정도로 보일 수 있지만, 경영 현장에서는 작은 결정 하나가 회사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대표 개인에게 결재권과 대외 신뢰, 거래처 관계, 회계 관리가 집중된 비상장 중소·중견기업일수록 위험은 커진다.
법률적으로도 단순하지 않다. 법무법인 원의 유선영 변호사는 본지 질의에 대해 “치매 증상이나 인지장애가 있다고 해 곧바로 의사능력이나 행위능력이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의사능력은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 행위능력은 유효한 법률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치매 진단서나 검사 결과, 당시의 구체적 사정 등을 종합해 법원이 판단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유 변호사는 “의사능력이 없는 사람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무효이고, 성년후견이나 한정후견 심판을 받은 사람처럼 행위능력이 제한되는 경우에는 행위를 취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치매 증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대표이사의 계약이나 금융거래를 곧바로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대목이 기업에는 가장 큰 위험이 된다. 유 변호사는 “인지기능 저하가 의심되는 경영자가 주요 계약, 금융거래, 투자, 인사 결정을 계속하는 경우, 인지 저하라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계약 체결 등의 행위가 무효이거나 취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러한 의사결정은 그대로 효력이 발생한다”고 했다.
회사 내부 결정이라면 사후에 취소하거나 번복해 손실을 줄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외부 계약이 체결됐거나, 내부 결정을 바탕으로 제3자와 거래가 이뤄진 경우에는 다르다. 유 변호사는 “대표이사의 인지장애만으로 곧바로 계약을 취소하거나 무효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외부적 효력이 발생하는 경영행위는 고스란히 그대로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고 밝혔다.
대표이사가 치매 증상을 보인다고 해도 곧바로 경영에서 배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표이사는 이사회 결의로 해임할 수 있다. 유 변호사는 대표이사의 인지 저하나 치매 증상이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면 해임은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경우 회사가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표이사직에서 해임되더라도 이사 지위는 그대로 유지된다.
경영자가 최대 주주라면 이사직 해임 ‘높은 산’
이사를 해임하려면 주주총회 특별결의가 필요하다. 출석 주주의 의결권 3분의 2 이상, 발행주식총수 3분의 1 이상의 찬성을 충족해야 한다. 오너가 최대주주인 회사라면 이 절차 자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대표권과 지분을 함께 가진 경영자의 인지장애가 단순한 건강 문제가 아니라 지배구조 문제로 번지는 이유다.
더 어려운 경우는 법적 직함보다 사실상 지배력이 큰 ‘실질적 경영자’다. 유 변호사는 “실질적 경영자는 사실상의 회사 지배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현실적으로 제어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다만 성년후견 심판을 통해 행위능력을 제한하고, 후견인이 법원의 허가를 받아 필요한 행위를 하도록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성년후견과 한정후견은 가족이 고려할 수 있는 마지막 법적 장치다. 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정신적 제약이 있어 스스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부족한 경우 성년후견을 신청할 수 있다. 정도가 그보다 가벼우면 한정후견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신청은 본인, 배우자, 4촌 이내 친족 등이 할 수 있고, 법원이 의사의 진단서와 치매검사 결과,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판단한다.
성년후견 심판이 내려지면 대표이사나 이사 지위에도 직접적인 영향이 생긴다. 유 변호사는 민법상 위임 규정에 따라 성년후견개시 심판을 받은 경우 대표이사나 이사는 당연히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결국 인지장애가 상당히 진행된 뒤에는 가족과 회사가 후견 절차를 통해 사후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지만, 그때는 이미 대외 계약과 내부 갈등이 발생한 뒤일 가능성이 크다.
경영자 인지장애 리스크, 사회적 공론화 필요
일본은 이 문제를 한국보다 먼저 겪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일본의 치매 고령자는 471만 명, 경도인지장애 고령자는 564만 명으로 추계됐다. 2040년에는 치매 고령자가 584만 명, 경도인지장애 고령자는 61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일본 중소기업청도 경영자 고령화를 사업 계속성의 문제로 다뤄 왔다.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2025년까지 70세를 넘는 중소기업·소규모사업자 경영자는 약 245만 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약 127만 명은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추산됐다. 방치할 경우 폐업 증가로 고용과 국내총생산에 큰 손실이 생길 수 있다는 경고도 제시됐다.
민간 조사에서도 경영자의 고령 리스크는 확인된다. 일본 기업 데이코쿠데이터뱅크가 2025년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2024년 일본 기업 사장의 평균 연령은 60.7세로, 34년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다. 사장 교체율은 3.75%에 그쳤다. 50세 이상 사장은 81.7%, 60세 이상 사장은 51.7%였다.
경영자의 건강 악화가 실제 기업 도산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늘고 있다. 데이코쿠데이터뱅크의 2025년도 기업도산 집계에 따르면 ‘경영자의 병·사망’을 주된 원인으로 한 도산은 350건으로, 전년도 316건보다 10.8% 증가했다. 이는 2000년도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
일본에서는 경영자의 치매를 이미 중소기업 경영의 실무 리스크로 다루고 있다. 일본 신탁협회는 사업승계신탁을 소개하며, 중소기업 경영자가 보유한 자사주를 미리 신탁해 두면 상속에 따른 경영 공백을 줄이고 사업을 원활히 이어갈 수 있다고 안내한다. 신탁협회 측은 인지·판단능력 저하 때 자사주 의결권 행사 지시권을 후계자에게 이전하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응의 초점을 사후 분쟁에서 사전 관리로 옮길 필요가 있다.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치매 환자의 금융자산 보호, 이른바 ‘치매 머니’ 관리가 정책 과제로 떠오른 것처럼, 고령 경영자의 인지장애가 기업에 미치는 위험도 별도의 관리 영역으로 다뤄야 한다. 경영자 개인의 건강 문제가 회사의 계약, 고용, 거래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이는 가족 내부에서만 감당할 문제가 아니다.
경영자가 건강할 때 대비책을 마련하는 일을 개인의 은퇴 준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업의 지속성과 종사자의 일자리, 거래망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과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초고령사회에 맞춰 치매 환자의 자산 보호가 정책 의제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처럼, 경영자의 인지장애 리스크에 대해서도 정부 차원의 제도 검토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