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한마디]

퇴근 무렵 몸이 으슬으슬하고 기운이 빠졌다.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잠을 잤지만, 다음 날은 더 나빴다. 몸이 무거워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출근을 미루고 누워 있는데 아버지가 불렀다. 나이 들어 처음으로 “못난 놈”이라는 꾸중을 먼저 들었다. 몸이 어떠냐고 물어본 아버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 손목부터 잡았다. 의약 지식이 풍부한 아버지가 이번엔 당신의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스스로 진맥했다. 손 진맥을 마친 아버지는 뜻밖의 처방을 내렸다. “양주 석 잔을 단숨에 마셔라. 그리고 뒷산을 한 바퀴 뛰고 와라.” 황당했지만 따랐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이내 숨이 거칠어지고 땀이 쏟아졌다. 내려올 때는 옷이 흠뻑 젖었지만 몸은 오히려 가벼웠다.
그날 아침까지 나는 마음속에 큰 짐을 안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해온 동창의 부탁 때문이었다. 다니는 회사의 당좌대출 만기를 연장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개인적 인연과 회사의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보고를 해야 할지, 선을 그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며칠째 속앓이를 했다. 그 고민이 쌓여 몸살로 나타난 것이었다. 다행히 상사가 “회사 차원에서 판단할 일”이라며 산을 오르기 전에 전화해 정리해주었다.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자 몸도 풀렸다. 오후에 바로 출근했다.
퇴근해 돌아오자 아버지는 “‘더 이상 못 버티니 쉬어달라’고 보내는 강력한 경고신호다”라고 몸살을 정의했다. 이어 “의학적으로는 육체적 피로, 스트레스, 감염 등으로 인해 근육통, 오한, 발열 등이 동반되는 전신 쇠약 상태다”라고도 했다. 결국 아버지가 내린 처방은 의학적인 치료를 넘어선 ‘삶의 태도’와 ‘생명력’에 관한 메시지였다.
아버지는 다시 “약은 증상을 누를 뿐이다. 마음속 응어리까지 풀어주지는 못한다. 오늘 네 상태는 기운의 흐름이 막힌 것이었다”라고 풀이했다. 양주 석 잔을 마시게 한 것은 일시적으로 몸의 긴장을 풀고 혈관을 확장해 기운을 돌게 하는 ‘마중물’ 역할이라고 설명해줬다. 뒷산을 달리게 한 것은 땀을 흘리고 거친 숨을 내쉬며 정체된 에너지를 강제로 순환시키는 행위라고 알려줬다.
“몸살은 종종 마음에서 온다. 아프다는 생각에 눕기만 하면 더 가라앉는다. 사람은 약 없이 못 일어날 만큼 약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아버지는 내 안의 ‘버티는 힘’을 깨우려 했다. 거친 숨과 땀 속에서 나는 오히려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이어 아버지는 “약은 치료가 아니라 지원이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아버지가 그날 몇 번이고 강조한 말이다. “열을 내리고 통증을 줄이는 동안 실제로 싸우는 것은 몸의 면역체계다. 약은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병을 이기는 주체는 결국 몸이다. 따라서 병인(病因)을 잡지 않으면 병은 반복된다. 스트레스는 그대로 둔 채 통증만 눌러서는 낫는 것이 아니라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중국 고사를 끄집어냈다. 후한 말의 명의 화타(華陀)는 같은 증상을 보이는 두 환자에게 각기 다른 처방을 내렸다. 둘은 부사(府使) 예심(倪尋)과 상인 이연공(李延共)이었다. 둘 다 두통과 열에 시달렸지만, 한 사람은 음식으로 인한 내부 문제였고, 다른 사람은 외부의 풍한 때문이었다. 증상은 같아도 원인이 달랐기에 처방도 달랐다. 이를 두고 ‘대증하약(對症下藥)’이라 한다. 증상에 맞게 약을 쓴다는 뜻이지만, 더 정확히는 원인에 맞게 처방한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평상시처럼 말씀 끝에 인용한 이 고사성어는 ‘삼국지 위서 화타전(三國志 魏書 華陀傳)’에 나온다.
화타는 오나라 손권(孫權)의 애원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생명이 위독한 주태(周泰)를 하루 종일 수술해서 완치시켰던 바로 그 사람이다. 아버지는 “독화살이 박힌 관우(關羽)의 어깨도 이를 째고 검게 변색된 뼈의 일부분을 긁어내는 시술로 중독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던 사람이다. 관우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연히 마량(馬良)과 바둑을 두면서 수술을 받았다는 것은 너도 읽어 아는 이야기다”라고 되뇌어줬다. 잦은 편두통을 호소하던 조조에게 마비산(麻沸散)을 이용한 뇌수술을 권했다가 조조를 살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끝내 그는 사형당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약을 함부로 먹지 마라. 병인을 먼저 찾아라. 몸은 생각보다 강하다”라는 의미로, 기억하기 쉬울 만큼 단순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생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를 덮지 말고 원인을 찾아라. 그래야 풀린다”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처방은 약이 아니었다. 내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몸살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삶이 어긋났다는 신호였다. 그 후 웬만한 병증으로는 좀체 약을 먹지 않는다. 견딜 만한 통증이라면 약보다 견디는 일이 삶을 명징(明澄)하게 한다. 툭하면 약부터 먼저 찾는 손주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도 이것이다. “약이 병을 고치는 게 아니다. 약은 도와줄 뿐이다. 낫게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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