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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핀 코스모스

입력 2026-04-30 06:00

[‘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 감동상]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프롤로그 :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

지금도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조건반사처럼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미군 부대 ‘캠프 페이지’ 담벼락에 기대어 살았던 20년의 세월이 내 몸에 화석처럼 새겨진 탓이다.

사람들은 춘천을 ‘호반의 도시’, ‘낭만의 도시’라 부른다. 안개 낀 의암호와 닭갈비 굽는 냄새, 경춘선 기차의 낭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에게 춘천은 낭만보다는 생존의 치열함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댐에 고향을 묻어야 했고, 전투기 소음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묻혀야 했으며, IMF라는 거대한 파도에 가정의 평화가 수장될 뻔했던 곳.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모진 풍파 속에서 나는 비로소 ‘엄마’라는 이름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이제야 나는 그 질퍽했던 시간을 건조해 양지로 꺼내 말려보려 한다. 이것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물에 빠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한 여자의 끈질긴 수영 일지이자, 뒤늦게 터트린 내 인생의 ‘브라보’에 대한 고백이다.


수몰(水沒) : 지도에서 지워진 고향

내 고향은 이제 지도 위에 없다. 1973년 소양강댐이 완공돼 담수가 시작되던 해, 인제군 남면의 우리 마을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동양 최대의 댐이 생겼다며 환호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통곡했다. 대대로 농사만 짓던 아버지는 “나랏일이라니 어쩔 수 없다”며 애써 담담해하셨지만, 이삿짐 트럭에 오르던 날 뒤도 돌아보지 않던 그 굽은 등을 나는 기억한다.

스무 살의 나는 ‘수몰민(水沒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춘천 시내로 나왔다. 보상금이라고 받은 돈은 낯선 도시에서의 정착비로, 그리고 아버지의 화병을 치료하는 약값으로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흙을 밟고 살던 사람들에게 아스팔트 바닥은 너무나 차갑고 미끄러웠다. 고향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우리 가족을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떠돌게 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내 삶의 터전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겠노라고. 단단한 땅 위에 내 집을 짓고,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내리겠노라고. 그 다짐 하나로 중동 건설 붐을 타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겠다는 남편을 기다렸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소음 속의 요람 : 캠프 페이지의 그림자

결혼 후 자리 잡은 곳은 춘천역 뒤편, 소양로 기와집 골목이었다. 미군 부대 캠프 페이지와는 불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둔 곳이었다. 싼 월세가 장점이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아파치 헬기가 이착륙할 때면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덜덜 떨렸고, 방 안의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 소음은 공포가 됐다. 갓 잠든 아이가 헬기의 굉음에 경기(驚氣)를 하며 깨어날 때마다, 나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밖이라고 해서 조용할 리 없었다. 거대한 프로펠러 바람이 골목의 흙먼지를 일으켰고, 나는 아이의 귀를 두 손으로 막은 채 웅크리고 앉아 헬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가, 괜찮아. 저건 그냥 큰 잠자리야. 우리 아가 놀라지 마라.”

그 시절 미군 부대 주변은 묘한 활기와 그늘이 공존했다. 소위 ‘양키 시장’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미제 초콜릿과 햄이 넘쳐났고, 저녁이면 클럽의 네온사인이 번쩍였다. 나는 그 화려함과 비루함이 뒤섞인 골목에서 콩나물값을 아끼고, 부업으로 인형 눈을 붙이며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웠다. 남편은 성실했다.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며 기름밥을 먹었고, 우리는 조금씩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는 재미로 그 시끄러운 소음을 견뎠다.

소음 피해 소송을 하면 보상금을 준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우리는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10년을 버티니 헬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고, 우리는 마침내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는 목돈을 손에 쥐게 됐다.


1997년의 겨울 : 두 번째 수몰

하지만 삶은 예고 없이 우리를 다시 깊은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1997년 말, 뉴스에서 낯선 영어 단어 ‘IMF’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국가 부도 위기라는 말이 실감 나기도 전에, 남편의 철물점 거래처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건설회사들이 부도를 내면서 남편이 받아온 어음들은 휴지 조각이 됐다. 빚을 내어 확장했던 가게는 순식간에 빚더미가 돼 우리를 덮쳤다. 이자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20%를 넘나들었다. 은행은 더 이상 우리의 이웃이 아니었다. 빚 독촉 전화는 헬기 소음보다 더 끔찍하게 우리 심장을 옥죄어왔다.

1998년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아파트 입주를 위해 모아둔 돈은 빚을 갚는 데 모두 들어갔고, 우리는 다시 월세방으로 나앉아야 했다. 남편은 매일 밤 소주를 마시며 울었다. “내가 못나서, 내가 병신 같아서….” 그 성실하던 남자의 입에서 자학의 말이 쏟아져 나올 때면 나는 댐 수문이 열린 것처럼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텔레비전에서는 ‘금 모으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돌 반지를 들고 나오는 사람, 결혼 예물을 내놓는 신혼부부들을 보며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결혼반지는 이미 쌀을 사기 위해 금은방에 넘긴 지 오래였다. 나라를 구한다는데, 보탤 금조차 없는 나의 가난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해 겨울, 남편은 삶의 의지를 놓으려 했다. 며칠째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우리 가족 모두가 침몰하겠구나. 누군가는 노를 저어야 했다. 나는 부엌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고, 난생처음 구인 광고 신문을 펼쳤다.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붉은 앞치마를 두른 전사

“식당 주방 보조 구함. 월 80만 원. 체력 좋은 분.”

마흔 중반의 나이에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이력서를 썼다. 춘천 중앙시장 근처의 백반집이었다. 새벽 5시에 출근해 밥을 안치고,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를 절이고, 설거지를 했다. 찬물에 손을 담글 때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고무장갑을 벗으면 손은 퉁퉁 불어 있었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식당에서 남은 반찬을 싸 들고 퇴근하는 길, 내 손에 쥐어진 일당은 남편의 기를 살리는 약값이자 아이들의 학비였다. 남편에게 “나도 돈 번다. 당신만 가장이 아니다. 우리가 같이 벌면 이 빚, 갚을 수 있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나의 당당한 모습에 남편도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그는 막노동판으로 나갔다.

우리는 낮에는 각자의 전장에서 싸우고, 밤이면 연탄보일러가 돌아가는 단칸방에서 서로의 파스 냄새를 맡으며 잠들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댐이 수몰되기 전 흙냄새 나던 고향 마을에 살 때처럼 평온해졌다.

우리는 바닥을 쳤기에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희망이 보였다.


돌봄, 나의 두 번째 이름

10년 넘게 식당 일을 하며 빚을 다 갚고 남매를 대학까지 보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식당 일을 그만둘 즈음, 나는 우연히 ‘요양보호사’ 교육과정을 알게 됐다. 평생 남의 밥을 해주던 손으로, 이제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돌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와닿았다.

주변 친구들은 “나이 들어서 왜 똥 기저귀 가는 일을 하느냐”며 말렸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천한 일이 아니라 가장 숭고한 일로 보였다. IMF 때 우리 가족이 서로를 보듬어 다시 일어섰듯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첫 돌봄 대상자는 치매를 앓는 여든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나를 죽은 딸로 착각하시곤 했다. “밥 먹었니? 춥지는 않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자식 걱정뿐인 할머니를 보며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떠올렸다. 나는 할머니의 거친 손을 잡고 노래를 불러드리고, 목욕을 시켜드렸다.

할머니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는 짧은 순간 내 손을 꼭 잡고 “고마워, 자네 덕분에 내가 사람답게 살아”라고 말씀하실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이었다. 댐에 수몰됐던 내 자존감이, 헬기 소음에 묻혔던 내 존재감이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더 공부했다. 요양보호사 1급 자격증을 따고, 치매 예방 놀이지도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나는 단순한 ‘파출부’가 아니었다. 나는 국가 자격을 갖춘 ‘돌봄 전문가’였다. 내 명함에 찍힌 ‘요양보호사 윤한나’ 세 글자는 그 어떤 감투보다 자랑스러웠다.


에필로그 : 다시 피어난 코스모스

얼마 전 캠프 페이지가 철거된 자리에 조성한 시민 공원을 걸었다. 그 시끄럽던 헬기장 활주로는 꽃밭이 됐고, 높게 쳐져 있던 담벼락은 허물어졌다. 가을바람에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있었다. 문득 50년 전 소양강댐 물속으로 사라지던 고향 길가의 코스모스가 생각났다.

그 꽃들은 물에 잠겨 죽었을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꽃의 씨앗들은 물결을 타고 흘러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고, 모진 풍파를 견디며 다시 피어났으리라 믿는다.

나는 실패했었다. 고향을 잃었고, 가난에 떨었고,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련들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식당 주방의 미끄러운 바닥이 나에게 균형 잡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치매 어르신의 기저귀를 가는 일이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가르쳐주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내 인생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브라보! 정말 수고했다. 그리고 참 잘 버텼다.”

나의 지난날은 후회와 실패의 얼룩이 아니라, 치열하게 싸워 이겨낸 훈장이다. 저 물 위에 뜬 부표처럼 가라앉을 듯 가라앉을 듯하면서도 끝내 떠올라 중심을 잡고 있는 내 인생. 이제 나는 안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반드시 봄은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봄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자의 것임을.

나는 오늘도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나의 돌봄이 필요한 누군가를 향해 힘차게 대문을 나선다. 이것이 나의 화려한 두 번째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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