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북] 김태훈 인지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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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하루를 보냈지만, 돌아보면 ‘내가 뭘 했지?’라는 허무함이 밀려오는 밤.
이러한 순간들은 단순한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내 머리가 굳어버린 걸까?
우리는 이런 순간을 두려워한다. (…) 하지만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런 ‘버퍼링 순간’에 주목한다.
당신의 뇌는 지금도 일하고 있다. 단지,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 ‘버퍼링 씽킹’, 21p
‘은퇴’라는 단어엔 여러 감정이 얽혀 있다. 한편으론 끝이고, 다른 한편으론 시작이다. “이제 뭐하지?”라는 질문 뒤 “나는 여전히 경쟁력이 있을까?”라는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신간 ‘버퍼링 씽킹’은 그 두려움을 다시 에너지로 만들어줄 방법을 제안한다.

살다 보면 마치 뇌가 멈춘 듯한 순간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갑자기 말문이 막히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고, 생각이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러한 순간을 보통 ‘무능함’이나 ‘집중력 저하’, ‘뇌의 노화’로 오해하고 자책하기도 한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인지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창의적 훈련법을 연구해온 김태훈 교수는 이 현상을 ‘버퍼링 씽킹(Buffering Thinking)’이라 부른다. 그의 신간 제목이기도 한 해당 개념은 단순히 사고가 멈췄다기보다, 뇌가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불안감에서 벗어나고자 즉각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마치 씨앗을 심어놓고 바로 나무가 자라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가치 있는 아이디어는 단순히 속도가 아니라 버퍼링 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신간 ‘버퍼링 씽킹’에서 김 교수는 또 다른 시작을 앞두고 재정비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사고법, ‘SCORE 프레임워크’를 제안한다. 그는 삶의 굴곡을 겪은 중장년층이라면 ‘SCORE 프레임워크’를 더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Sense(관찰), Constrain(제약), Reorganize(재구성), Relate(연결), Execute(실행). 다섯 단계는 창의성을 ‘훈련 가능한 능력’으로 바꾸는 전략이다.

창의력=후천적 능력
김 교수가 설명하는 창의성은 젊은 시절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경험이 축적된, 50대 이후의 시간은 더 깊고 실질적인 창의성을 펼칠 수 있는 시기라고 강조한다. 창의적인 사고가 과거의 삶을 되짚어보고 새로운 인생을 전략적으로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제롬 브루너, 도널드 브로드벤트와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도 ‘가장 창의적이었던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 ‘(노인이 된)지금’이라고 답했어요. 나이 들면 창의성이 퇴화한다는 건 오해입니다. 쉼 없이 달려오면서 성실, 노력, 인내로 버텨냈지만 생각할 여유가 자주 희생됐기 때문에 그렇게 여길 수 있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올해 50세라고 해도 앞으로 40~50년을 더 살아가야 하는 시대예요. 과거처럼 은퇴가 곧 인생의 마무리가 아닌 만큼, 지금부터는 ‘어떻게 다시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해요.”

멈추고, 들여다보고, 다시 질문하기
김 교수는 ‘SCORE 훈련’을 그 발판으로 제안한다. 구체적으로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관찰’, 제한된 환경을 설정해 사고력을 끌어올릴 ‘제약’,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 바라보는 ‘재구성’, 재료를 색다르게 조합하는 ‘연결’, 마지막으로 ‘실행’이다.
“다만 중장년층은 전문성과 경험이 쌓일수록 오히려 ‘관찰’이 부정확해질 수 있어요. ‘내가 다 봤다’는 착각 때문에 익숙함 속에서 사물과 현상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게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보던 방식이 아니라, 현재 내가 처한 위치와 목표에 맞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은퇴 후 시간은 늘지만 자원과 기회가 줄어드는 탓에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오히려 ‘제약’을 통해 사고의 범위를 집약하면 대안이 보인다고 말한다. 무엇이 부족한지보다 무엇이 가능한지에 집중하면 사고를 활성화하는 힘이 된다는 설명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계획은 없다. 우선 작은 모델을 만들어보고, 보완하며 더 나아갈 수 있다. 기존에 이질적이라 여겼던 것들을 ‘재구성’해 다른 방법으로 ‘연결’해보고, 아이디어를 ‘실행’해 현실로 만들면 된다.

소중한 아이디어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것 또한 실력이다.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별다른 목적 없이 모여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아이디어가 발전되기도 한다.
지식은 확장되고 사상은 정교해지며 예술적 표현 방식도 발전한 것이다.
작은 여유를 내어 창의적인 활동들을 꾸준히 해나가면 어떨까?
촘촘하고 다양한 연결이 머릿속에만 있던 작은 아이디어를
거대한 가능성으로 확장시켜줄 것이다.
- ‘버퍼링 씽킹’, 252~254p
더 나은 삶을 위한 멈춤
디지털 시대의 정보 과잉 속에서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만연해진 지금, 사회를 함께 개척해온 중장년층은 사고 전환의 방식을 비교적 빨리 받아들일 수 있다. 성실한 태도로 삶을 살아왔기에 ‘SCORE 프레임워크’를 잘 다져두면 후반으로 갈수록 추진력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단계를 따라 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들을 위해 김 교수는 진화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을 예로 들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실행’으로 걷기를 꼽는다.
“요즘은 모르는 게 생기면 스마트폰을 먼저 켭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 전에는 우선 고민하다 지인에게 물어보거나 책을 찾아보면서 사고를 확장하곤 했잖아요. 같은 맥락으로 ‘걷기’를 추천합니다. 무작정 밖으로 나서기 전에, 고민되는 부분을 떠올려본 뒤 걷는 게 좋아요. 중구난방으로 퍼져 있던 생각을 한 방향으로 모으는 작업이죠. 찰스 다윈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숲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대요. 책상에 앉아 고민하기보다 걷는 동안 생각이 더 명확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어려우면 사람들을 만나 가벼운 대화를 해보는 방법도 있어요. 시간의 틈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채워가며 나를 숙성해보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