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의 생각]

필자는 요즘 시니어(Senior)라는 낱말의 무게감을 부쩍 느끼곤 합니다.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가 쓴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비극(The Tragedy of Julius Caesar)’에 카이사르(BC 100~BC 44)의 최후를 그린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작품에서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가 왕정을 꿈꾼다는 이유로 최측근으로 여겼던 공화주의자 마르쿠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 85~BC 42)에게 암살당하는 순간,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고 말하죠. 그런데 카이사르가 숨을 거둔 곳이 바로 로마 원로원(라틴어 Senatus, 영어 Senate), 즉 오늘날의 상원(Senate)입니다. 세나투스(Senatus)는 지금 우리가 쓰는 시니어와 어원을 공유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근래에는 ‘늙은이’, ‘노인’, ‘연장자’라는 말보다 ‘시니어 경제인’, ‘시니어 법조인’, ‘시니어 의료인’처럼 시니어라는 표현이 점차 뿌리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시니어란 사회 지도층이라는 뜻과 함께 우선 건강해야 한다는 ‘숨은 조건’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노인네’로 전락하고 맙니다. 시니어의 조건이 이처럼 녹록지 않으니 아무나 시니어가 되는 게 아니지요.
또한 시니어에는 ‘지혜로움’이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젊은이가 지식을 갖고 능동적이라면, 시니어는 지혜롭고 수동적입니다. 이는 나이 든 사람의 특권에 버금가는 특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식이 동(動)적이라면, 지혜는 정(靜)적입니다. ‘지식 없는 지혜는 없다’는 말처럼 지혜는 지식의 ‘늙음’이기도 합니다. 즉 지혜는 지식과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우월적 관계에 있습니다. 시니어라는 호칭에 ‘힘’이 실리는 까닭입니다.
중학교 시절 필자는 집안 어른으로부터 ‘사슴(鹿)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큰 사슴일수록 먹잇감이 있으면 크게 소리 내며 울어댄다는 것이었습니다. “얘들아, 여기 먹을 것이 있으니 모두 모여서 함께 즐기자”라는 뜻이죠. 이를 녹명(鹿鳴)이라고 합니다. 무슨 우화 같은데, 왠지 그 이야기가 필자의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필자는 어느 날 공직에서 물러나 정년퇴직자 그룹에 진입했습니다.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사회의 시니어로서 70대를 넘어 80대에 들어섰고, 그에 따라 몸과 마음가짐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 듦의 무게’가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자연현상의 중심에 ‘품격’이라는 핵심 요소가 내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독일 남부의 알프스산맥과 가까운 뮌헨 대학교에서 유학할 때, 그 지역의 가정집이나 대형 식당 벽에는 크고 작은 ‘사슴뿔(獨, Hirschhorn)’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알프스 지방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슴 사냥을 중요한 취미로 여기던 원로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슴의 뿔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 같아서 화려하고 멋져 보이지. 하지만 위기를 만나 탈출하려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숲속에 몸을 숨기지 못하는 결정적 결함이 있다네. 그러니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한테는 그 화려한 뿔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겠는가.” 그러면서 교수님은 사뭇 사슴을 동정하는 듯한 표정까지 지었습니다.

과연 그럴 것 같습니다. 덩치 큰 사슴은 도망치려고 해도 그 화려하고 ‘왕관’ 같은 뿔 때문에 샛길로 들어가 몸을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때 어렸을 적 들었던 ‘녹명 이야기’를 들려드렸더니, 교수님은 매우 놀라워하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다시 시니어 얘기로 돌아와서, 시니어라는 낱말에는 ‘위에서 밑으로’, 즉 베풂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수(如水), 즉 ‘물이 아래로 흐르듯’ 말입니다.
시니어가 되고 보니 그 호칭이 종종 보이지 않는 ‘마음의 사슴뿔’인 듯싶어 몸가짐을 둘러보게 됩니다. 외출할 때면, 특히 제자나 후배들과 만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국내 대기업의 저명한 어른께 손주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여쭌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주신 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하며 공부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라지요.” 그러면서 덧붙이길, 손주들이 찾아오면 자신의 옷차림에 흐트러짐이 없는지를 먼저 챙긴다고 하셨습니다. 올곧은 ‘몸 갖춤’을 손주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시니어의 깊은 뜻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인문학의 속내’와 궤를 같이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부자는 자식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
좁게는 가정교육에서, 넓게는 각기 다른 교육과정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근래 우리 사회가 요동치듯 혼란스러운 것은 ‘인문학 결핍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시니어들이 능동적인 역할을 찾아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