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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은 늘어놓고 빨래는 널어놓고

기사입력 2020-04-08 09:04

[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4월 1일(수)부터 ‘임철순의 즐거운 세상’을 주 1회 온라인 연재합니다. 코로나19로 어둡고 우울한 시대에, 삶의 즐거움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유머로 버무려 함께 나누는 칼럼입니다.

청명, 한식도 지나 천지는 꽃이 한창인데, 나가서 놀 수 없으니 참 환장 된장하겠지요?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아예 유채꽃밭을 갈아엎고, 벚꽃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길을 막는 판이니 집에서 꽃 같은 마누라나 쳐다보고 살아야지 별수 있겠수? 아무래도 꽃 같지 않으면? 눈 딱 감고 꽃이라고 불러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고 하잖우?

며칠 전, 3대 9년 만에 마나님과 같이 양재천을 2시간 산보했다는 사람이 카톡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는데 “벌써 벚꽃이 지기 시작하더라”고 썼더군요. 그러면서 시 두 편을 인용했어요(그분이 쓴 대로 옮김).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서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 먼 산이 다가서다.” 또 하나는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설어마라/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가노라 휘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라는 시였어요. 그러면서 두 시가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앞의 시는 조지훈의 ‘낙화’, 다음 것은 송순(1493~1583)의 시조인데, 시상이 비슷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꽃이 죽을 둥 살 둥 온 힘을 다해 피고 있는 판에 벌써 진다고 하는 데 심통이 나서 나도 모르게 교정본능이 발동했지요. 이런 카톡 대화가 오갔습니다.

-역시 겡상도. 별이 하나 둘 서러진다고라고라고라고라?

-서러진다가 아니고 뭐당가?

-서러진다→스러진다. 강물아 헐러헐러 어디로 가니? ㅋㅋㅋ

-내가 봐도 한심하네.

-오날도오 걷는다이마는, 남들은 이렇게 방랑을 노래할 때 겡상도 여러분은 오날도오 긋는다이마는, 요렇게 여기저기 외상을 달아놓고 댕깁네다.

-이 좋은 시들이 고노무 갱상도 땜시로 완존 묻쳐버렸네. 근데 솔직히 말해 서러지고나 스러지고나 그게 그거 아닌감요?

-글면 서러운 게 스러운 거와 같남유? 그리움과 거리움이 같구유? 바리케이더 암만 쳐봐야 헛일이고, 고속버스 트미널 가봐야 버스 타기 어려울기구마는.

경남 남해가 고향인 그분은 끝까지 으와 어가 잘 구분되지 않는 거 같았습니다. “최소한 나한티는 그게 거게지라” 하며 마무리를 했거든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요. 내가 아는 다른 사람, 이 사람은 경남 진주가 고향인데 남해 사람보다 더 심합니다. 말이 그렇게 나오니 그렇게 쓰는 거겠지만, 며칠 전에도 외래어를 현지 발음 기준으로 표기하려면 ‘그기’ 발음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철저히 연구 분석한 바는 없으나 ‘으’를 ‘어’로 잘못 쓰기보다 ‘어’를 ‘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 거 같습니다.

그러나 우야든동(남해 사람은 우야동동이라고 합디다) 나는 경상도 사투리 좋아합니다. 재미있어요, “사랑합니다”를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난 때려쥐기도 그런 말 몬한다.” 이런 농담 얼마나 재미있나요? 경상도 사투리의 대표적 예화는 “뱅갑이 아배요…”로 시작되는 경북 영양 사투리인데. 어떤 사람들한테는 암호 해독하는 것만큼 어려울 거 같습니다. 아직 모르는 분은 찾아보시길.

이 세상에 같은 말은 안 계십니다. “우리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요? 내가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인용하는 모범 문장이 있습니다. “야, 니 남편 참 멋있더라” 하는 것과 “야, 니 남편 참 맛있더라” 하는 게 같겠습니까? 이 말만 하면 다들 꼼짝 못하고 100% 납득하더군요.

으와 어를 구분하지 못하면 어흐흐 하고 울고 싶을 때 으허허 또는 으흐흐 하고 웃게 됩니다. 으와 어가 헷갈리면 하던지와 하든지의 차이도 모르게 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던은 과거요, 든은 선택, 구분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힘들겠지만 두 가지를 잘 구분하시되 사설(社說이든 辭說이든)이라면 늘어놓고, 빨래라면 널어놓으세요. 단, 늘어놓은 거든 널어놓은 거든 나중에 정리하고 거두는 건 다 자기 몫입니다.

임철순 약력

서울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역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등 수상. 저서 ‘손들지 않는 기자들’, ‘노래도 늙는구나’ 등. 대한민국서예대전 5회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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