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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으로의 여행

기사입력 2019-11-21 15:32

▲부여 정림사지 터와 5층석탑(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 터와 5층석탑(서동환 동년기자)

로마 시내에 있는 ‘포로 로마노’는 로마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돌과 기둥 몇 개만 남아있는 이곳이 로마 제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 유적지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바로 시간을 넘나드는 우리들의 상상력 때문이다. 이곳에 입장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번 이상은 보았던 장면을 상상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포로 로마노 가운데 큰길을 행진하는 로마의 개선장군 행렬.’ 그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길 양쪽에서 뒹굴고 있던 돌들이 고대 로마의 공회당, 바실리카, 무녀의 집, 각종 신전으로 만들어진다. 지붕 골격과 기둥만 남은 폐허는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개선문으로 탈바꿈한다.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그려진 상상은 논증을 기준 삼아 과학적으로 복원한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있던 것이 없어서 누릴 수 있는 감동이다.

고대 유적지를 만나는 일은 잃어버린 시간의 마력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다.

백제는 국력이 회복되자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에는 좋으나 협소한 지역 때문에 부족한 면이 있던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다(538년). 그 후 123년 동안 사비(부여)에서 후기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늦가을에 떠난 백제 역사 유적지로의 여행은 ‘포로 로마노’에서의 경험처럼 과거를 ‘체험한’ 알찬 시간이었다.

▲부여 백제역사유적지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백제역사유적지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서동환 동년기자)
▲백제가 도읍을 부여로 옮긴 백제사비시대의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지 터(서동환 동년기자)
▲백제가 도읍을 부여로 옮긴 백제사비시대의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지 터(서동환 동년기자)
▲관북리 유적지 터2(서동환 동년기자)
▲관북리 유적지 터2(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사비도성 가상체험관2(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사비도성 가상체험관2(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사비(부여)의 새 왕궁은 부소산 기슭에 세워졌다. 그래서 현재의 관북리 유적을 왕궁으로 보고 있다. 관북리 유적의 대표 유적은 왕과 신하들이 회의하던 중심 궁전인 ‘정전’으로 추측되는 대형 건물지다. 그 외에도 목곽 수조 2곳과 연못, 지하저장시설 등의 흔적들이 있다. 왕궁의 뒤편은 왕궁의 후원이자 비상시 방어성으로 사용된 부소산성이다. 천천히 왕궁터와 부소산성을 걸으면 백제의 기품과 기상을 만날 수 있다. 왕궁터에서 산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이 있다. 이곳에도 잠시 들러 관람과 가상 체험을 하면 백제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산성 내부에는 낙화암과 고란사 등 백제의 전설과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부여 부소산성 문(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부소산성 문(서동환 동년기자)
▲부소산성의 가을(서동환 동년기자)
▲부소산성의 가을(서동환 동년기자)
▲부소산 낙화암 정상에 있는 백화정(서동환 동년기자)
▲부소산 낙화암 정상에 있는 백화정(서동환 동년기자)
▲낙화암 백화정에서 본 백마강 (서동환 동년기자)
▲낙화암 백화정에서 본 백마강 (서동환 동년기자)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3천 궁녀의 전설지인 낙화암으로 갔다. 낙화암은 금강의 부여 지역 구간 이름인 백마강가에 있는 높이 40m의 바위 절벽이다. 직접 가서 보니 3천 명이 떨어져 죽을 정도가 되는 지형은 아니었다. 절벽 위에 있는 백화정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보았다. 3천 궁녀의 이야기는 기록에 없는 과장된 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이다. 하지만 확인 안 된 그런 이야기에 대한 의구심보다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몇천 년 후까지 전해지는 전설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여 정림사지박물관(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박물관(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박물관 내부(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박물관 내부(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박물관 내부2(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박물관 내부2(서동환 동년기자)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중인 백제 금동대향로(서동환 동년기자)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중인 백제 금동대향로(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와적기단(서동환 동년기자)
▲부여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와적기단(서동환 동년기자)

백제의 품격 정림사지

부여에는 백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소로 정림사지 박물관이 있다. 중국에서 들어와 일본에 영향을 준 백제 고유의 불교 문화와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옆에 있는 정림사지는 사비(부여)의 중심부에 있는 사찰 터로 백제 사찰의 특징인 1탑 1금당(절의 본당)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한, 백제의 독창적 기술인 와적기단을 적용하였다.(※ 와적기단: 건물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

사찰 터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국보 제9호로 백제 고유의 양식을 갖추었다. 석탑은 목탑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는 탑으로 높이 8.3m에 완벽한 균형미와 비례미를 갖추고 있다. 안타까웠던 것은 석탑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 내용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림사가 백제 왕조의 운명과 직결된 중요하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존재했음을 말한다. 부여시대의 백제가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탑에 새겨진 글씨를 보는 마음은 씁쓸했다.

여행이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는 것은 아니다. 아름답고 빛나는 것들도 포화상태가 되면 감도가 떨어지고 피곤해진다. 그래서 가끔은 부끄러운 과거도 보고, 이름 모르는 작은 마을도 다니고, 도시의 뒷골목도 다녀 보아야 한다.

오후의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가을날에 빈 공간이 많은 정림사지의 가운데에 섰다. 이 넓은 터에 모든 것이 있었던 한 때를 반추해 보았다. 지금은 없는 것들이 한때는 빛났었다는 것을, 지금 빛나는 것들도 언젠가는 소멸하리라는 것을.

가을의 끝 무렵에서 만난 부여의 오랜 역사 유적지들은 나에게 성찰의 공간이 되었다.

▪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 77.

▪ 정림사지 박물관: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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