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답사기]
또다시 여름이다. 여름 볕이 짙어지고 그 볕 아래 푸른 신록을 내다보며 문득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목이 멘다. 뜨겁던 여름 햇볕 아래 마음마저 푸르렀던 시절이 있었다. 땡볕도 폭염도 어쩌지 못하던 뜨겁던 날, 가슴 서늘하게 드리우던 푸르름만으로 충분했던 날, 향수 어린 옥천의 여름을 만났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충북 옥천의 들판을 달리다 보면 금강 지류가 함께한다. 그 물결을 거스르며 달리면 양옆으로 펼쳐지는 포플러 가로수가 줄지어 맞는다. 온유하기만 한 향수(鄕愁)를 선물하는 풍경에 저절로 뭉클해질 수밖에 없다.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상춘정·부소담악
물길 위로 오롯한 정자 상춘정(常春亭)이 고고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곳에 당연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하게 마주한다. 금강이 흐르는 물 위로 섬처럼 봉긋 솟아오른 독산에 자리를 튼 상춘정이 한 폭의 산수화다. ‘주변 풍경이 늘 봄과 같다’고 이름 붙여진 상춘정은 금강 비경 11선이다. 옥천을 지나는 이들을 가슴 설레게 하는 독특함으로 시선을 끈다. 물이 맑은 보청천은 한때 인근 주민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즐기던 곳이다. 이제는 언덕 나무 그늘에선 일손을 멈춘 마을 어른이 쉬고 있고,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의 모습이 하세월 유유자적이다.
상춘정을 떠받치고 유유히 흐르는 보청천은 보은과 옥천 청산면의 첫 글자를 딴 이름이다. 보은 속리산 골짜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굽이굽이 흘러 옥천의 넓은 벌 동쪽 끝 마을 청산면으로 흘러든다. 아름다운 시처럼 ‘실개천을 휘돌아’ 흐르던 물줄기가 보청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이처럼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운무 어린 새벽이나 노을 질 무렵이면 물 위로 비치는 산과 정자의 실루엣이 연출하는 풍경이 몽환적이다. 밤이 깊어지면 하늘 가득 뿌려진 은하수가 선명하게 빛나는 별천지는 순수 자연 옥천이어서 가능하다.

금강을 따라 형성된 옥천의 자연 명소 ‘부소담악’도 빠질 수 없는 절경이다. 옥천 9경 중 3경으로 호수에 떠 있는 약 700m 길이의 병풍바위 부소담악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소금강이라 이름 지었을 정도였다. 본래 산이었는데 1980년 대청댐 준공으로 지금은 물에 잠긴 산 위로 바위가 뜬 모양이 됐다. 탐스러운 수국이 풍성한 산책로를 걸어 추소정에 오르면 용이 호수 위를 유영하는 듯한 절경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옛터는 가까이 보면 놀랍기만 하고 물 건너 아득히 바라보면 가슴 저릿하다.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옥천 구읍
시인이 살던 초가삼간은 옥천 구읍에 자리 잡고 있다. 구읍은 옥천군 관아가 있던 곳으로 근대까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옥천의 옛 중심지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옥천군 관아 중심가가 옥천역 주변으로 이전되었고, 옛 시가지는 ‘구읍(舊邑)’으로 불리게 됐다. 구읍은 옥천의 역사와 정취가 살아 숨 쉬는 터다.
오래전의 문화유산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구읍은 옥천 9경 중 9경이다. 여기는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이 우선이다. 지용문학공원, 옥천향교, 전통문화체험관, 교동호수도 인근에 가까이 있어 돌아보기 편리하다.
정지용 시인은 말 그대로 구읍을 상징하는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정지용 시인의 이름과 ‘향수’의 시구(詩句)가 눈길 닿는 곳마다 보인다.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이 붙어 있는 마을 어귀엔 정지용의 시어가 담긴 담배 가게나 미용실이 눈에 들어온다. 낮은 사립문 옆 감나무에선 감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초가삼간 툇마루 안쪽, 시인이 사용했음직한 조그마한 책상과 질화로가 그토록 섬세한 언어를 지어내게 했을까 생각해본다. 작은 마당 풀밭의 ‘얼룩백이 황소’ 또한 ‘꿈엔들 잊힐 리’ 없는 어린 시절의 모습인 듯싶다. 사립문 밖의 정지용문학관이 반듯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시인의 밀랍 인형을 지나 들어선 전시실에선 시종일관 ‘향수’ 노래가 흐른다. 문학관은 테마별로 정지용의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공간이 마련돼 있어 천천히 시인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구읍을 지나다 보면 바람에 펄럭이는 글귀가 눈에 띈다. 해마다 정지용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지용제가 펼쳐지는데, ‘詩끌벅적 문학 축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산을 배경으로 한 지용문학공원 아래 푸짐하게 벌어지는 행사는 지역민들이 그야말로 시끌벅적 적극 참여하는 행사다.
옥천향교와 옥천전통문화체험관도 쉬어가기 좋다. 향교 맞은편으로 옥천전통문화체험관이 차분하게 터를 잡고 있어 여유롭게 둘러볼 만하다. 품격 있는 전통문화의 향기가 풀풀 나는 너른 잔디마당을 걸으며 한숨 돌리고,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 풀꽃을 들여다보기 좋은 쉼터다. 도심과는 다른 작은 소읍의 고즈넉함으로 마냥 편안하고 여유롭다. 누구나 친근하게 우리의 풍류와 멋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전통문화 체험, 전시회뿐 아니라 한옥 숙박도 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구읍을 돌아보다 여기서 가성비 좋은 정갈한 식사도 할 수 있다.
구읍을 벗어나면서 옥주사마소, 육영수 생가를 지나 죽향초등학교 구교사를 둘러보는 것도 즐겁다. 어릴 적 목조 교사의 흔적을 들여다보며 옛 추억을 더듬는 아련한 시간도 마음에 남는다. 풀밭 광장과 아름다운 수변 휴식 공간인 교동저수지에서의 산책도 잊지 못할 시간이다.

일상의 쉼표 옥천성당, 천상 화원 화인산림욕장
여행길 이른 시간에 주변의 성당이나 절집을 들러보는 일은 기분을 정화하는 시간이다. 개인의 종교와 상관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나 마감할 무렵 잠시 들르면 마음을 정돈하고 의지할 힘을 얻는 느낌이다. 연한 파스텔 색감의 정갈한 옥천성당은 1900년대 초 옥천공소로 설립됐다. 건축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건물로 국가등록문화재이기도 하다.
옥천 구읍에서 벗어나 산길을 30여 분 달리면 천상의 정원 수생식물학습원이 나타난다. 무수한 수생식물이 조화롭게 자라나는 자연 속에서 한없이 평화롭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정원을 두른 듯한 대청호수의 푸른 물결에 머릿속이 개운하게 헹구어지는 것 같다. 정원 길 끄트머리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당도 나타나고, 자연 속에 푹 잠긴 이국적인 건축물이 시선을 사로잡기도 한다. 방문 전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하루 종일 숲에 잠겨 있고 싶다면 메타세쿼이아 숲속 화인산림욕장이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메타세쿼이아 숲은 국내 최대 규모다. 계단이나 오름길이 없는 비교적 난도 낮은 숲길에서의 힐링은 더할 나위 없다. 생명력 가득한 자연의 푸르름 속에서 마음까지 청명해진다. 빽빽한 나무 틈새로 하늘을 바라보며 온몸의 세포가 치유되는 시간이다.
옥천은 어딜 돌아봐도 대청호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호수 주변으로 자연과 삶의 풍경이 겹치면서 고향 같은 안온함을 얻는다. 대청호의 잔잔한 물결을 따라 조붓한 시골길을 달리는 건 단지 이동의 즐거움만이 아니다. 느릿하게 지방 소읍의 길 위를 지나는 시간은 마음의 평온이 넘치는 순간이다. 옥천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 고향을 불러내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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