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답사기]
아직은 춥다. 일단 나서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쨍하게 시린 공기 앞에서 마음까지 맑아진다. 이 계절에 조금 더 추운 땅에 서는 게 ‘오히려 좋아’를 느끼게 된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경기도 연천군은 낮은 기온으로 손꼽히는 대한민국 최북단이며, 최전방이라는 말이 언제나 따라붙는다. 일기예보에서는 전국이 얼어붙었다고 하는데 연천군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연천군에 막상 들어서니 청명하고 여유롭다. 가길 잘했다.
무균실처럼 때 묻지 않은 청정 자연 속에 들다
우선 연천군의 가장 북쪽으로 달려 임진강평화습지원을 가보고 싶었다. 민통선 안에 자리 잡은 DMZ 생태 여행 명소로, 깊은 자연 속에서 두루미 떼의 일상을 볼 수 있다. 계절에 따라 율무밭이나 자잘한 들꽃과 순수한 생태습지의 다양한 변화가 있으나 영하 15℃를 가뿐히 넘기는 겨울의 연천군은 어떨지 궁금하다.
민통선 내의 임진강평화습지원을 가려면 신분증이 꼭 필요하다. DSLR 카메라도 허락하지 않는다. 초소 앞에서 잠깐 멈춰 군인들의 검문을 받는다. 초소를 통과한 후 임진강평화습지원으로 향했다. 빈 논의 두루미 떼 모습이 한가로움 그 자체다. 최북단이라는 긴장감보다는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찬 공기가 낮게 가라앉은 임진강평화습지원은 완벽한 무음지대 같다.
인적조차 없는 산책로를 따라 두루미식물원을 시작으로 평화 꽃단지, 두루미 꽃단지, 관찰광장, 평화광장을 지나 생태연못으로 이어진다. 망원경을 통해 먼발치의 임진강 여울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가끔 날아오르는 두루미 떼가 눈에 들어온다.
한 시간 남짓 천천히 걷다 보면 저 멀리 습지원을 둘러싼 겨울 산의 능선이 아련하다. 야트막한 능선 아래 청정 지역 DMZ의 흔적을 본다. 연천군 특산물인 율무 재배단지가 겨울을 나느라 텅 빈 밭에 보이는 동물들의 배설물이 자연스럽다. 출렁다리 건너편의 연강갤러리도 문이 닫혀 있고 모든 게 정지된 듯 보인다. 가끔 무성한 갈대숲이 바람 소리를 낸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뚝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이다. 소란한 세상을 피하고 싶을 때 떠올릴 만한 공간이다. 마치 무균실을 혼자 차지한 기분이다.
고요를 가르는 우아한 날갯짓, 두루미의 비상
연천군은 두루미와 밀접한 연관을 지녔기에 두루미마을도 있다. 청정 마을인 삼곶리의 두루미마을을 지나면 두루미 테마파크도 만난다. 가까운 북녘땅에서 내려온 임진강변 홍수 조절용 군남댐 건설로 사라진 두루미 서식처를 대체하기 위해 지역 특성을 반영해 조성했다.
철새 도래지인 연천군에선 겨울이면 두루미 떼의 비상을 볼 수 있다. 임진강과 첩첩 산자락이 어우러진 풍광을 배경으로 두루미가 비행하는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다. 간간이 두루미를 관찰할 수 있도록 설치한 탐조대도 나타난다.
예부터 두루미는 십장생의 하나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는 두루미는 해마다 시월 중순쯤에 날아와 이듬해 삼월까지 이 땅에서 생활한다. 이 무렵이면 임진강 유역에서 만날 수 있는 두루미의 비행을 촬영하기 위해 긴 망원렌즈를 든 사진가들이 찾아들기도 한다. 두루미는 연천군의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군민들은 연천군 특산물인 율무와 쌀을 두루미 먹이터에 뿌려주고, 자발적 생태 관찰과 구조 활동까지 벌인다. 덕분에 임진강을 찾는 두루미 개체수는 해마다 조금씩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고고한 두루미가 날아가는 잔잔한 정경이 더없이 평화로운 연천군이다.

굴뚝에서 피어난 예술, 은대리 문화벽돌공장과 옛 연천역
민통선을 벗어나 연천 시내 쪽으로 들어가 본다. 폐벽돌 공장이 예술 문화 공간으로 변신한 ‘연천 은대리 문화벽돌공장’은 두 개의 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한때 이 지역 산업의 중심지로 붉은 벽돌을 구워내던 공장이 폐업했다. 그 후 20년간 방치됐다가 지난해 7월 감각적인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공장 앞에는 강렬한 그래피티의 오래된 굴뚝이 수문장처럼 우뚝 서서 관람객을 맞는다. 굴뚝 구조물 그림에 은대리에서만 볼 수 있는 생명체 물거미가 담겨 있다. 흔하지 않은 굴뚝 그래피티로 이젠 힙한 포토존이 됐다.
빵 굽는 냄새가 솔솔 나는 문화벽돌공장 실내를 가로질러 은대리 문화벽돌 공장 내 전시관 입구에 서니 1983㎡(약 600평)의 전시장이 펼쳐진다. 예술가들의 전시 작품과 예전 벽돌 공장의 흔적을 살필 수 있도록 색다른 전시장 풍경을 품고 있다. 크게 보면 공간 전체가 거대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전시관 코너에서 미디어아트로 표현하는 연천군의 이야기가 환상적이다. 오랜 시간 썰렁하게 방치됐던 벽돌 공장이 온기로 가득 채워졌다.
지나가는 길에 들른 연천역. 근래 연천역 전철 개통으로 서울 기준 1호선 타고 떠나는 여행이 가능하다. 옛 연천역 건물은 연천을 알리는 작품과 특산품 등의 전시와 편의시설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특히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오래된 시설인 급수탑이 역사(驛舍) 중심에 위치해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총탄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성
은대리 벽돌 공장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거리에 은대리성이 있다. 은대리성은 삼국시대 고구려군의 남진 과정을 알 수 있는 성곽이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독특한 모습이다. 겨울의 은대리성은 한적하다. 성 앞에 서면 나지막한 평지로 보이는데, 저 아래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면 한탄강 위로 가장 높은 지대인 걸 알 수 있다. 꽤 운치 있는 겨울 산책길이다.
은대리성과 함께 호로고루성, 당포성은 연천을 대표하는 고구려 3대 성이다. 임진강이 만들어내는 주상절리 끝자락에 자리한 당포성은 얼핏 오르기 좋은 낮은 언덕처럼 보인다. 나무 계단을 통해 오르면 사방이 거침없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당포성의 랜드마크 같은 나무 한 그루가 겨울의 당포성을 지키는 모습이다. 또 한 군데, 구릉지대처럼 보이는 호로고루성의 하늘 계단은 SNS에 자주 오르고 드라마 등의 촬영지로도 알려졌다. 여름과 가을이면 성 앞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해바라기밭은 단번에 연천군의 명소가 된다.
자연 병풍 같은 동이리 주상절리
동이리 주상절리는 동이대교 저편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부터 임진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병풍처럼 장관을 이룬 주상절리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얼어붙은 강물 위로 기다랗게 펼쳐지는 주상절리에 켜켜이 아득한 태곳적 이야기가 스며 있는 듯하다.
지난해 말 개관한 임진강자연센터는 전망 기능과 전시관이 어우러져 실내 공간에서도 주상절리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 다양한 자료와 미디어 영상을 갖췄고, 자연이 빚은 시간의 흔적 또한 가득하다.
연천군은 청정한 자연환경 자체로 ‘로하스 연천’이라 불린다. 인류의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전곡선사박물관, 애틋한 전설이 담긴 재인폭포, 숭의전,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랑포구 역사공원, 최전방의 전망대, 힐링 여정 연강 나룻길과 옥녀봉의 그리팅맨. 봄날 청정 숲길엔 벚꽃과 신록이 어우러지고, 여름이면 연천군 최고의 특산물인 율무가 익어간다. 가을의 댑싸리 정원, 경원선 철길 폐터널에선 겨울이면 아래에서 위로 자라는 신비로운 역고드름… 연천군의 맑은 공기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어디쯤엔가 와 있을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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