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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佛千塔 이야기② 보은 법주사(法住寺)

기사입력 2018-08-31 16:34

우리나라 열세 번째 세계유산,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속리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 높이 16.5m에 수령 600년이 넘었는데 풍파에 시달리고 솔잎흑파리 등 병치레로 한때 많이 손상되었지만 지극정성으로 제법 눈에 띄게 회복되어 보인다. 세조가 법주사에 행차할 때 가지를 들어주어 임금의 가마 연(輦)이 걸리지 않게 해주었고 돌아갈 때는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게 해 준 공로로 정이품을 제수받은 소나무이다. (김신묵 동년기자)
▲속리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 높이 16.5m에 수령 600년이 넘었는데 풍파에 시달리고 솔잎흑파리 등 병치레로 한때 많이 손상되었지만 지극정성으로 제법 눈에 띄게 회복되어 보인다. 세조가 법주사에 행차할 때 가지를 들어주어 임금의 가마 연(輦)이 걸리지 않게 해주었고 돌아갈 때는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게 해 준 공로로 정이품을 제수받은 소나무이다. (김신묵 동년기자)

정이품송과 식당가를 지나 산사 7곳 중 가장 비싼 입장권(4000원)을 끊고 떡갈나무 우거진 맑은 계류(溪流)를 따라 오리 숲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 즉 호서(충청)지방 제일의 절집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아래 안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씌어 있어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법주사 일주문(一柱門). 기둥이 (하나가 아니라) 한 줄로 있어 일주문이라고 하는데 사찰의 첫 번째 문으로 일심(一心)으로 들어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안쪽에 걸린 현판은 光武六年(1903년)에 썼다고 하는데 일주문 자체는 근래에 세운 것으로 지정문화재는 아니다. (김신묵 동년기자)
▲법주사 일주문(一柱門). 기둥이 (하나가 아니라) 한 줄로 있어 일주문이라고 하는데 사찰의 첫 번째 문으로 일심(一心)으로 들어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안쪽에 걸린 현판은 光武六年(1903년)에 썼다고 하는데 일주문 자체는 근래에 세운 것으로 지정문화재는 아니다. (김신묵 동년기자)

오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나오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당대의 석학이며 명필인 송시열, 송준길, 낭선군 이름을 들으니 대단한 비석임을 알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벽암대사비 옆에 서있는 또 다른 비석에 있는 禁遊客除雜役(금유객제잡역: 할 일없이 떠도는 이를 금하고 잡스러움을 제한다)라는 글귀인데 여느 절에 있는 하마석(下馬石) 보다 강력한 경고로 보인다. (김신묵 동년기자)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당대의 석학이며 명필인 송시열, 송준길, 낭선군 이름을 들으니 대단한 비석임을 알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벽암대사비 옆에 서있는 또 다른 비석에 있는 禁遊客除雜役(금유객제잡역: 할 일없이 떠도는 이를 금하고 잡스러움을 제한다)라는 글귀인데 여느 절에 있는 하마석(下馬石) 보다 강력한 경고로 보인다. (김신묵 동년기자)

오리 숲길을 벗어나 계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는 사실상 첫 관문인 금강문이다. 마곡사가 해탈문이 첫 관문이듯 법주사는 금강문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분들은 문수, 보현보살과 금강역사로 똑같다.

다만 마곡사는 보현과 문수 모두 동자상을 모셨는데 법주사는 어린 동자상이 아닌 보살상을 모신 점과 해탈문이 아닌 금강문으로 부르는 점이 다르다.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산중에 위치한 산사(山寺)지만 전체적으로 평지 지형에 크고 작은 당우(堂宇)들이 자리 잡고 있다.

▲법주사 배치도. 첫 관문 금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천왕문⑬, 왼쪽으로는 철당간⑫과 석련지⑪, 돌확⑩, 오른쪽으로 철확⑭이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직선으로 팔상전④, 쌍사자 석등⑤, 사천왕 석등⑥, 대웅보전ⓛ이 중심축으로 이어지며, 쌍사자 석등에서 왼쪽으로 원통보전③과 희견보살입상②이 이어지는데 그 끝에는 법상종의 주존불인 미륵불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었으나 무너지고 없어진 뒤로 지금은 남으로 10m 이동한 자리에 높이 33m의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세웠다.
▲법주사 배치도. 첫 관문 금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천왕문⑬, 왼쪽으로는 철당간⑫과 석련지⑪, 돌확⑩, 오른쪽으로 철확⑭이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직선으로 팔상전④, 쌍사자 석등⑤, 사천왕 석등⑥, 대웅보전ⓛ이 중심축으로 이어지며, 쌍사자 석등에서 왼쪽으로 원통보전③과 희견보살입상②이 이어지는데 그 끝에는 법상종의 주존불인 미륵불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었으나 무너지고 없어진 뒤로 지금은 남으로 10m 이동한 자리에 높이 33m의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세웠다.

▲금강문에 서서 바라본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보통 정면 3칸임을 고려할 때 가장 큰 규모로 보이며 그 앞에 선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는 마치 금강역사상이 굳게 지키는 듯 상징적인 모습이다. 특히 사천왕들이 밟고 있는 요괴들 사이에 유생이나 관리, 포졸 등으로 보이는 상(像)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억불숭유(抑佛崇儒)에 대한 무언의 반박이 아닌가 싶다. (김신묵 동년기자)
▲금강문에 서서 바라본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보통 정면 3칸임을 고려할 때 가장 큰 규모로 보이며 그 앞에 선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는 마치 금강역사상이 굳게 지키는 듯 상징적인 모습이다. 특히 사천왕들이 밟고 있는 요괴들 사이에 유생이나 관리, 포졸 등으로 보이는 상(像)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억불숭유(抑佛崇儒)에 대한 무언의 반박이 아닌가 싶다. (김신묵 동년기자)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금강문 바로 왼쪽에 높다랗게 솟은 철당간은 원래 고려 목종 때 16m로 제작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당백전을 만드는 데 사용(1866년)했다고 하며 1907년 순조 때 22m로 다시 세운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으며 지금은 1972년 새로 세운 것이다.(김신묵 동년기자)
▲금강문 바로 왼쪽에 높다랗게 솟은 철당간은 원래 고려 목종 때 16m로 제작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당백전을 만드는 데 사용(1866년)했다고 하며 1907년 순조 때 22m로 다시 세운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으며 지금은 1972년 새로 세운 것이다.(김신묵 동년기자)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 석련지(石蓮池, 국보 제64호). 신라 성덕왕 19년(720) 경에 조성된 것으로 8각의 받침돌 위에 사잇돌을 끼워 큼직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다. 몸돌은 커다란 돌을 깎아 내부를 만들었는데 아래는 작은 연꽃이, 위로는 큼지막한 연꽃을 둘러 새겼으며 가장자리로는 난간석을 깎아 얹었는데 우아하며 예스러운 모습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돌로 만든 작은 연못 석련지(石蓮池, 국보 제64호). 신라 성덕왕 19년(720) 경에 조성된 것으로 8각의 받침돌 위에 사잇돌을 끼워 큼직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다. 몸돌은 커다란 돌을 깎아 내부를 만들었는데 아래는 작은 연꽃이, 위로는 큼지막한 연꽃을 둘러 새겼으며 가장자리로는 난간석을 깎아 얹었는데 우아하며 예스러운 모습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팔상전(국보 제55호), 1984년 쌍봉사 삼층목탑이 화재로 불탄 후 유일한 목탑이 되었다. 1층과 2층은 정면과 측면이 5칸, 3층과 4층은 3칸, 5층은 2칸의 정방형 건물이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이나 5층은 기둥 사이에도 포를 올린 다포식이다.(김신묵 동년기자)
▲팔상전(국보 제55호), 1984년 쌍봉사 삼층목탑이 화재로 불탄 후 유일한 목탑이 되었다. 1층과 2층은 정면과 측면이 5칸, 3층과 4층은 3칸, 5층은 2칸의 정방형 건물이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이나 5층은 기둥 사이에도 포를 올린 다포식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내부는 층별 구분 없이 트인 공간으로 가운데 네모진 벽을 세우고 사방 네 곳에 2폭씩의 팔상도(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그림)를 모셔놓아 팔상전이라고 한다.(김신묵 동년기자)
▲내부는 층별 구분 없이 트인 공간으로 가운데 네모진 벽을 세우고 사방 네 곳에 2폭씩의 팔상도(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그림)를 모셔놓아 팔상전이라고 한다.(김신묵 동년기자)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때까지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서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는 획기적인 시도였으며 지붕돌과 화사석, 디딤돌부터 사자가 받치는 앙련석이 각각 하나씩 모두 3개의 돌로 구성되었다.(김신묵 동년기자)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때까지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서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는 획기적인 시도였으며 지붕돌과 화사석, 디딤돌부터 사자가 받치는 앙련석이 각각 하나씩 모두 3개의 돌로 구성되었다.(김신묵 동년기자)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양식 2층 팔작지붕 건물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2005년 원형 복원공사를 마쳤으며 높이 20m에 이르는 2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하나의 공간이다.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佛殿) 중 하나이며 대웅보전 앞에 세운 사천왕 석등은 보물 제15호이다.(김신묵 동년기자)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양식 2층 팔작지붕 건물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2005년 원형 복원공사를 마쳤으며 높이 20m에 이르는 2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하나의 공간이다.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佛殿) 중 하나이며 대웅보전 앞에 세운 사천왕 석등은 보물 제15호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대웅보전 내부에 모신 삼존불(보물 제1360호)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앉은키가 5.5m로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큰 불상이다. (김신묵 동년기자)
▲대웅보전 내부에 모신 삼존불(보물 제1360호)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앉은키가 5.5m로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큰 불상이다. (김신묵 동년기자)

그런데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금강문을 들어서서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법당으로는 드물게 사모지붕을 올린 원통전(보물 제916호)과 안에 모신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의 정방형 건물로 불국사 비로전과 법주사 원통보전만이 사모지붕을 얹은 네모꼴 불전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법당으로는 드물게 사모지붕을 올린 원통전(보물 제916호)과 안에 모신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의 정방형 건물로 불국사 비로전과 법주사 원통보전만이 사모지붕을 얹은 네모꼴 불전이다.(김신묵 동년기자)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자연암반 지대석 위에 받침돌을 얹고 그 위로 보살상을 세워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인데 최대의 공양을 올리고 그 과보로 약왕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보기 드문 보살상이다.(김신묵 동년기자)
▲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자연암반 지대석 위에 받침돌을 얹고 그 위로 보살상을 세워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인데 최대의 공양을 올리고 그 과보로 약왕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보기 드문 보살상이다.(김신묵 동년기자)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금동미륵대불, 임진왜란 때 훼손되고 대원군 때 헐려나갔다가 시멘트 불상으로 복원 후 마침내 청동미륵대불을 세웠으며 옛 진표율사가 조성했다는 금동불로 완성하였다. 25m 미륵불은 시무외여원인을 취하고 있으며 지하 용화전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모셨다.(김신묵 동년기자)
▲금동미륵대불, 임진왜란 때 훼손되고 대원군 때 헐려나갔다가 시멘트 불상으로 복원 후 마침내 청동미륵대불을 세웠으며 옛 진표율사가 조성했다는 금동불로 완성하였다. 25m 미륵불은 시무외여원인을 취하고 있으며 지하 용화전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모셨다.(김신묵 동년기자)

이렇게 해서 법주사 경내는 대략 돌아보았다. 물론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또한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높이 약 6m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좌상이며, 옆 바위에 새긴 지장보살과 함께 미륵 신앙이라는 법주사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앞에 꿇어앉은 소를 새겼는데 의신조사의 창건설화를 나타낸 암각화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높이 약 6m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좌상이며, 옆 바위에 새긴 지장보살과 함께 미륵 신앙이라는 법주사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앞에 꿇어앉은 소를 새겼는데 의신조사의 창건설화를 나타낸 암각화이다.(김신묵 동년기자)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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