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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기② 전남 나주 향교(鄕校)

기사입력 2018-06-18 14:58

조선 후기 향교 건축의 대표건물 대성전(大聖殿)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이다.

지방에 세운 향교는 국가가 유교 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켰다. 교육의 기능 외에도 지방 단위 유교적 행사를 치르는 문화기능을 담당했다. 또, 생원·진사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 시험을 통과하여 중앙의 정치권에 진입하는 정치기능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나주 향교(사적 제483호)는 나주읍성의 서쪽 성문 밖에 자리 잡고 있다. 향교가 있어 동네 이름이 교동(校洞)인데 전국에 향교가 있는 많은 곳 또한 교동(校洞)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교육시설을 크기로 따지면 나주 향교가 성균관 다음으로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다.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대성전(大聖殿)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 건축을 대표할 만큼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나주 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년) 처음 지어져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와 달리 나주 향교는 앞에 사당을 두고 뒤에 강당을 둔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이제는 교육의 기능을 하지 않으나 정기적인 제향을 올리거나 방문객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나주 향교 대성전(보물 제394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의 건물에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기둥 위에만 공포가 얹힌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크기나 모양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성전 중에 으뜸으로 인정받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 성균관을 다시 지을 때 이곳을 참조하였다고 한다.(김신묵 동년기자)
▲나주 향교 대성전(보물 제394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의 건물에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기둥 위에만 공포가 얹힌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크기나 모양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성전 중에 으뜸으로 인정받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 성균관을 다시 지을 때 이곳을 참조하였다고 한다.(김신묵 동년기자)

대성전(大成殿)은 문성왕(文聖王)으로 부르는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사성(四聖)과 안연, 자공, 자로 등 10명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 주돈이, 정이, 장재 등 송조육현(宋朝六賢)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등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를 함께 모셔 정기적인 향사(享祀)를 올린다.

나주 향교의 주춧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는데, 이는 검박한 유교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꾸밈이다. 특히 연꽃이 불교적인 무늬임을 감안하면 이곳이 전에는 사찰이었거나 근처의 절집 주춧돌을 가져와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주 향교 대성전 주춧돌, 큼직하고 뚜렷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김신묵 동년기자)
▲나주 향교 대성전 주춧돌, 큼직하고 뚜렷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김신묵 동년기자)

▲나주 향교 명륜당(明倫堂). 대성전 담장 뒤편이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앙 건물에 좌우로 날개처럼 건물이 이어진 구조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나주 향교 명륜당(明倫堂). 대성전 담장 뒤편이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앙 건물에 좌우로 날개처럼 건물이 이어진 구조이다.(김신묵 동년기자)

향교 돌담 밖으로는 여러 개의 비석을 모아 놓았다. 관아에 있는 비석들은 대부분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공덕비이다. 이곳 향교에는 학문을 펼치는데 애써주심에 감사한다는 흥학불망비(興學不忘碑)들이다.

▲나주 향교 비석군. 특히 정유재란 때 향교의 수복(首僕, 노비의 우두머리)인 김애남이 위패를 등에 지고 금성산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안전하게 모신 공으로 정려가 내려져 사후에 충복사(忠僕祠)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없어지고 유허비만 남아 눈길을 끈다.(김신묵 동년기자)
▲나주 향교 비석군. 특히 정유재란 때 향교의 수복(首僕, 노비의 우두머리)인 김애남이 위패를 등에 지고 금성산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안전하게 모신 공으로 정려가 내려져 사후에 충복사(忠僕祠)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없어지고 유허비만 남아 눈길을 끈다.(김신묵 동년기자)

전국 군(郡) 단위로 대부분 향교를 보유하고 있으나 나주 향교 대성전은 서울의 문묘와 전북 장수향교, 강원도 강릉향교 등과 함께 웅장한 규모로 손꼽히는 건물이다. 대성전 벽에 바른 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왔다고 할 만큼 자부심을 갖는 곳이다.

그밖에도 근처에는 나주읍성 4대 성문중 서쪽 문인 서성문(사적 제337호)이 있다. 관아는 남아 있지 않으나 목사(牧師)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금학헌(琴鶴軒)과 관아 정문 정수루(正綏樓) 등이 있어 시간을 내어 둘러볼 만하다.

▲나주관아 정문 정수루(正綏樓), 누각 형태의 관아 정문이다. 2층에 놓인 북은 시간을 알릴 때 쳤다는 이야기와 학봉 김성일이 나주 목사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던 신문고 북으로 설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김신묵 동년기자)
▲나주관아 정문 정수루(正綏樓), 누각 형태의 관아 정문이다. 2층에 놓인 북은 시간을 알릴 때 쳤다는 이야기와 학봉 김성일이 나주 목사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던 신문고 북으로 설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김신묵 동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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