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숲]
숲으로 가는 산언저리마다 눈부시다. 밭두렁에 애기똥풀 흐드러져 숫제 샛노란 화단이다. 다랑논 이고 있는 석축에 어린 그늘이 푸르도록 짙은 건, 5월 한낮의 봄 햇살이 밝아서다. 민들레는 수과(瘦果)를 매단 채, 건듯 부는 미풍에 갓털을 휘날린다. 진초록으로 이미 농익은 초목 잎사귀들. 산야에 뿌리박은 식물마다 의기양양하다. 길로 나다니는 사람만이 계절을 타 들썩인다.
개심사(開心寺) 일주문을 지나자, 일변 눈으로 가득 차오르는 소나무들. 고찰(古刹)치고 들머리 풍광 허술한 곳이 드물다. 개심사 숲길도 기중 반열에 든다. 솔숲에 불그레한 빛살이 어린다. 적송(赤松)들이어서다. 미끈한 붉은 살갗에 건강한 지체, 게다가 저마다 미묘하게 굽어 허리를 요리저리 비트니 수려하다 못해 관능적이다. 흐뭇하면 안고 싶고, 심취하면 안기고 싶어진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굽고 휜 소나무는 내심 안도할 게다. 쭉쭉 곧게 자란 나무들보다 더 온전하게 수명을 누릴 수 있으니까. 목수의 도끼날을 피할 수 있어서다. 목재로서는 별 쓸모가 없게 생긴 덕분이다. 목수의 눈엔 무용지물이지만 소나무 입장에선 천행이다. 그게 나무만의 일이랴. 우리네 인생사에도 자주 적용되는, 일종의 이치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에 실린 메시지를 생각해보라.
물매진 들머리 숲길, 그 이후로는 돌계단길이 가지런하다. 여기서도 소나무들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펼쳐진다. 나무들의 청신한 향이 그윽하게 번진다. 개심사 전각들 지붕마다 초록이 서린다. 초록 숲 안의 산사여서다.
뜰에 걸린 연등들로 경내가 환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뒤면 석탄일이다.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꿈꾸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그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연등공양이란 부처를 숨 쉬고 꿈꾸고 그리는 일이겠지.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우고, 그리해서 나를 찾아가는 기도일 게다.
천년도량의 위세에 걸맞게 개심사 전각들은 방정하거나 준수하다. 혹은 허심히 잘 늙은 고로(古老)처럼 고졸하다. 전각 속엔 나무가 박혀 있다. 휜 채로, 비틀어진 채로, 그러니까 굽은 원목 그대로를 베어 말려 기둥을 삼고 들보로 채택했다. 주야로 법당의 향훈을 취할 저 고색창연한 재목들. 남벌 탓에 곧은 목재를 구할 수 없어 굽은 나무를 그냥 그대로 썼을까? 쓸모없어 보였을 나무가 쓸모 있게 쓰였다. 거룩한 불상과 동거하며, 더 온전히 살아남았다. ‘곡즉전(曲則全)’이라, ‘굽어서(曲) 온전할(全) 수 있다’는 묘리를 전갈한 이는 노자였다.
개심사는 실로 수목의 향연장이다. 그 친숙한 명성으로 한 벼슬 걸친 거목들의 장원이다.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전나무, 서어나무, 왕벚나무…. 국내엔 이곳에만 있다는 청벚나무에선, 시나브로 봄이 가건만 여전히 끝물 꽃잎들 분분히 낙화한다.
개심사를 벗어나 다시 숲길을 오른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이어진다. 키 작은 관목들. 곧게 뻗어 하늘 한 자락 움켜쥐는 활엽 교목들. 온갖 나무들이 빼곡 들어차 기세를 돋운다.
인간의 도시는 삼엄한 사각의 링을 닮았다. 나무들은 코피를 쏟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경쟁을 능사로 삼는 대신, 상호 의존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한다. 바위 벼랑에 위태롭게 매달린 소나무만 해도 그렇다. 곰팡이와 공생해 균근(菌根)을 만들고, 그 균근에서 발달한 팡이실로 바위 틈새의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소나무는 공생과 상생, 인류의 그 오래된 이상(理想)을 소리 소문 없이 오롯이 구가한다.
숲길에 하오의 놀빛이 어린다. 폐사지 보원사지에 간신히 남은 석탑에도 황혼녘 주황물이 흥건하다. 간절한 탑돌이를 하며 합장 비손했을 옛사람들, 지금은 천상의 어느 푸른 공간에 머무시나. 옛사람들에겐 나무도 석탑과 매한가지였다. 성황당 신목(神木)에 의지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을 천상에 탄원했다. 삶이, 영혼이, 견딜 수 없이 슬플 땐, 조용히 숲에 들어가 하늘을 우러렀다. 그래서 숲은 일쑤 정결한 지성소였다. 그들은 숲에서 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탐방 Tip
개심사와 보원사지를 잇는 숲길은, 충남 내포 지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내포문화숲길’ 코스들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구간이다. 개심사에서 보원사지까지는 약 2km 거리. 산마루를 넘자면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유하지만 가파르지 않다. 보원사지에서 1.3km를 더 내려가면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