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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 남자여”

기사입력 2018-05-16 09:15

3호선 전철 안. 빈자리는 없고 서 있는 사람이 공간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붐빌 때와는 달리 적당한 거리가 훨씬 쾌적한 느낌이었다.

양재역에 도착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탔고 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섰다.

앞 의자에는 40대로 보이는 인상 좋은 여성 둘이 친구처럼 다정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작은 소리로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문득 무엇인가를 알아챈 듯 잠시 움찔거리는 듯했다. 그러더니 그중 하나가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 난 아직 남자여.”

그는 손짓으로 일어나려는 여성을 제지했다. 순간 돌아보았다. 정말 듣기 힘든 말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선했다.

그는 가는 허리와 다리를 헐렁한 옷으로 가리고 지팡이를 든, 누가 봐도 할아버지였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야윈 몸을 감싼 양복에는 나름대로 한껏 멋을 부린 흔적이 역력했다. 색깔 맞춰 입은 콤비 양복은 좀 허름해 보였다. 그러나 주름진 얼굴에서는 윤기가 났고 움푹 파인 눈이었지만 초롱초롱 빛나기까지 했다. 그를 향해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 멋지세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게 말을 걸었다. “늙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계속 손사래를 치면서도 지팡이를 꼭 짚고 있는 것이 걸렸는지 앞자리의 여자 둘이 또 일어나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제지했다. 그러자 여성 둘이 일어나며 말했다.

“저희 내려요.”

그 말에 할아버지는 앉았고 나도 불러서 옆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여성 둘은 내리지 않고 구석으로 가서 양보한 것을 감추려고 했다.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덩치 좋은 남자들이 전철에서 억지로 구겨 앉으며 여성을 배려하지 않으면 보기 좋지 않았다. 남자라고 언제나 힘이 남아돌지는 않겠지만 보기는 좋지 않았다.

경로석에서는 할머니들이 타도 할아버지들이 꿋꿋이 앉아가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것도 보기 좋지 않았다.

대접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때는 갑질이다. 갑이 아닌데도 갑질을 하면 작은 사람이다. 갑인데도 갑질하지 않으면 보기 좋다. 그럴 때 큰 사람같이 느껴진다.

한 사람의 배려가 주위를 얼마나 환하게 기분 좋은 기운으로 밝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초라한 옷차림이 그의 인품을 가리지 못했 듯, 화려한 차림도 인품을 빛나게 하지는 못한다. 덕분에 기분 좋은 귀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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