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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농사를 마감하다

기사입력 2017-11-24 13:18

필자가 사는 오피스텔 화단은 허리 높이의 지저분한 쓰레기장이었다. 인근 PC방 청소년들이 담배꽁초나 음료수 빈병을 버리는 지저분한 곳이었다.

필자는 4년 전 종로5가 묘목상에서 머루나무 한 그루를 샀다. 화분에 담긴 가냘픈 가지에 머루 한 송이가 눈에 들어 와 샀고 실내에서 키웠었다. 그러나 북향집이라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어 이듬해 봄에 오피스텔 화단 한 구석에 옮겨 심은 것이다. 그런데 이 머루나무가 예쁜 초록 잎을 내밀더니 한 여름에는 화단을 온통 덮을 만큼 넝쿨을 뻗으며 괴물처럼 자랐다. 수없이 넝쿨 가지를 새로 뻗으며 위로는 건물을 타고 올라가려 하고 밖으로는 인도로 넘실거리며 자랐다. 필자가 하는 일은 넝쿨을 화단 내에 그냥 자라도록 위로 또는 밖으로 자라려는 넝쿨 순을 화단 안쪽으로 구부려 넣는 것이었다. 식물 기르기를 좋아하는 필자에게 좋은 힐링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한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너무 예쁘니 건물 벽을 머루나무가 넝쿨이 올라가서 덮도록 키우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말 없는 주민들은 화단 내에서 자라도록 관리되는 것을 바라는 것 같았다. 여전히 동네 청소년들이 담배꽁초와 음료수 통을 넝쿨 사이에 박아 넣기도 했다. 아침마다 그것을 치우는 일이 필자의 몫이었다. 건물 청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맡기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필자의 소관으로 삼았다.

한 여름에 넝쿨 사이를 보니 포도송이처럼 탐스럽게 머루 열매를 수북하게 맺고 있었다. 차도 변이라 중금속에 오염되었을 것이니 먹을 수는 없었다. 주민들에게 까맣게 익으면 수시로 따먹으라고 했다.

며칠 전 날씨가 영하 6도로 내려가던 날, 머루나무 잎이 얼어서 그대로 말라 버렸다. 지저분해진 것이다. 그냥 두자니 보기에도 흉물일 뿐 아니라 청소년들이 담배꽁초를 끄지도 않고 버리면 마른 잎이 화재를 유발할 수도 있어 보였다.

그래서 2500원짜리 100리터 쓰레기봉투를 샀다. 그리고 리퍼로 무성해진 넝쿨을 자르고 마른 잎을 모아 담았다. 지나던 주민이 청소부 아저씨에게 맡기라고 했지만, 30분이면 할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화단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한해 농사를 마감했고 겨울 준비가 끝난 것이다.

이제 새봄이 오면 머루 넝쿨은 맹렬한 기세로 초록 잎을 피우며 자랄 것이다. 이사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만약 이사 간다면 누가 머루나무를 돌볼 것인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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