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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 만난 거룩한 분노

기사입력 2017-08-17 20:37

어려서부터 ‘오지라퍼’ 기질을 보인 필자는 그냥 지나쳐도 좋을 일에 몸을 던지는 적이 많았다. 예컨대 동네를 지나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싸우고 있으면 꼭 참견해서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누가 옳고 그른지 끝까지 판단해주고 심판관 노릇을 자임했다. 그들은 대부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싸움을 그치게 했다는 사실에 늘 의기양양해했다.

이런 버릇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승화되어갔다. 특히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일에 흥분지수가 제일 많이 올라간다. 길에 아이스크림 껍질을 버리고 가는 중학생을 불러 세워 줍게 하는 등 동네 파수꾼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까지 느끼곤 했다. 사실 그 감정의 정체가 분노인지 용기인지 잘 분간이 안 될 때가 많았지만, 스스로 거룩한 분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날도 거룩한 분노는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 차선을 달리던 고급 세단의 창이 열리더니 운전자가 손가락 끝으로 담배꽁초를 튕기는 게 아닌가. 그때 좀 더 주의 깊게 봤어야 했다. 검은 양복 소매와 금장 고급시계를. 그러나 거룩한 분노는 나의 눈을 멀게 했고 무모한 손은 경음기를 힘차게 ‘빵빵’ 누르고야 말았다.

‘정의의 사도 황금박쥐’를 보고 자란 세대들은 다 알 것이다. 그들에게 경고를 보낸 것은 당연하며 훌륭한 시민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라고. 속으로 ‘그래 잘 걸렸다. 어디 얼굴이나 한번 보자’ 하고 쫓아가 신호등 앞에 나란히 서서 그 운전자를 째려보았다. 그런데 아뿔싸! 깍두기 머리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험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덟 개의 눈동자가.

순간 머리끝이 쭈뼛해지고 온몸에 전율이 지나갔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 죽기 직전의 순간 어릴 적 일부터 온갖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더니 그것이 사실이구나! 그중 ‘너 공연히 남 일에 참견하고 다니다 큰일 난다’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크게 메아리쳤다. 신호가 바뀌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도망치는 그 짧은 순간에 어디론가 끌려가 묶여 있는 모습, 그들이 뒤쫓아 와 차를 뒤에서 박는 상상, 가족들의 울부짖는 광경 등 별의별 생각들로 마치 슬로비디오를 튼 것처럼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목적지도 잊은 채 얼마를 갔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그 검은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의 십년감수는 지금도 생생하다. 아, 거룩한 분노도 함부로 지를 일이 아니구나.

나이 든 지금, 젊은 날의 그런 모습을 떠올리게 되면 ‘거룩한 분노는 무슨, 그저 분노조절 장애였지’ 하며 피식 웃곤 한다. 아무리 그 분노가 거룩해도 분노는 분노일 따름이다. 속으로 숙성되지 못한 분노는 그저 상대방을 해치는 칼일 따름이다. 지금은 아무리 아니꼬운 장면을 봐도 일단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 감정이 숙성하기를 기다린다. 누가 봐도 그 모습은 딱 비겁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딸들에게 고스란히 유전된 것을! 어느새 딸들도 친구들 문제 해결사가 되어 있었다. 아, 이 질긴 오지랖의 DNA여! 그나마 남편의 피로 조금 희석되어 분노의 색깔이 빠진 것이 다행이다. 어느 날은 세 명 모두 방에서 각자의 휴대폰을 통해 상담하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그래, 분노가 문제지 오지랖이야 무슨 죄가 있담.’ 필자도 어느새 친구의 고민을 상담하고 있다. 제 문제는 풀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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