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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송시월과 나누다]

기사입력 2017-07-31 10:41

수유리 419 묘지 옆 한신대학교 정문 입구에는 문익환 목사의 시비가 있다. 네모의 유리 상자 속에 본인의 작품인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세로줄 시가 금관의 나비문양처럼 빛을 발하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잠꼬대 하듯 소리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둘레를 돌아가며 빽빽하게 새겨진 뜻을 모은 지인들의 이름을 읽으니 금싸라기들이 금덩어리로 모여져 잠꼬대라는 언어를 최고의 예술품으로 형상화시켜 놓은 걸작임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그는 생전에 자기의 이상을 잠꼬대 아닌 잠꼬대로 중얼거리며 분단시대의 산물인 주홍글씨를 달고 살았지만 이 시비가 증명하듯 동시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 때 모든 시인들의 연인이었던 고정희 시인도 이 학교인 한신대 출신이다. 전남 해남군 송정리에서 태어났으며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 과정을 거쳐서 이 학교에 입학을 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인 김재준, 문익환 같은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졸업한 후에도 사회 부조리와 싸우며 현실 인식과 비정한 역사의 증언을 담은 목적시를 치열하게 썼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고독과 눈물의 정서로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서정시를 쓰다, 1991년 지리산 등반을 하다가 실족사 했다. 그녀의 넋을 위로라도 하는 듯 여름철새들의 잠꼬대가 교정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인 <상한 갈대를 위하여>란 시를 음미해보자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맛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시인의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전문

형상화가 최고의 예술로 마치 신라의 왕을 만난 듯 황홀경에 빠져 넋을 놓고 귀기울이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시비에 취해 나도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읖조려본다.

금관의 언어

문익환 당신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4.19 묘지 뒤쪽 한신대학교 정문에

금관 같은 시비로 환생했습니다

너무나 정교하면서도 미로 같은 언어의 구도,

수런거리는 금관을 연상케 하는 시비입니다

당신의 잠꼬대는 당신이 듣지 못합니다.

나의 잠꼬대는 내가 듣지 못합니다.

반드시 타인을 통해서만 나의 잠꼬대는 들을 수 있듯이

당신의 잠꼬대는 우리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잠꼬대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늘 갈망하던 무엇인가가 당신의 영혼 속에 잠재해 있다가 당신도 모르게

잠꼬대로 튀어 나온 것입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신라 천년 문화의 상징이 한신대 정문 입구에

화려하고도 중후하게 되살아나 역사를 증언하듯

금빛을 반사하며 잠꼬대로 두런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알아듣지 못해도 뭉쿨한 이 감동

내 안의 강을 뜨거운 피가 휘돌아 흐르는 느낌입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두런거리는 금빛 언어들, 참 신기 합니다.

문익환 당신은 늘 이념의 붉은 딱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살다가

우주로 귀환한 뒤에야 금싸라기 땀방울들이 한데 모여

당신을 부활시켜 놓았습니다.

둥근 세계인 그 곳에서도 잠꼬대 같은 언어가 통용 됩니까?

당신이 남긴 잠꼬대의 금관은 우리의 발길을 잠시 머물게 합니다.

사각의 유리 안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살랑거리듯 신라 천년의 금관에

노랑나비 나풀거리듯 언어들의 고요한 속삭임이 들립니다.

저 금관은 아무리 써 보고 싶어도 호흡이 있는 자에겐 불가능 합니다.

발치에 있는 315기의 영령이 머리를 맛댄 4.19탑

그 오랜 시간의 표면에서 금빛 언어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햇살이 저들에게 언어의 금관을 씌워 놓은 것일까요.

잘 익은 살구처럼 햇빛을 받으면 더욱 황금빛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갈망하던 세계, 그 미완의 이상을 후배들이 완전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으니까요.

너무 일찍 떠난 고정희 시인도 모교인 당신 곁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잠꼬대하듯 시를 두런거리고 있습니다.

수유리 수유리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의 여울목에서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기를 갈망하는 그대여.

500년 늙은 소나무가 내려다보고 있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생가보다

모교인 한신대학교 교정에서 419영령들과 함께 비정한 역사의 증언과 더불어

인간 내면의 슬픔과 고독한 눈물의 정서를 시로 승화시키며 구도자처럼 살다가

지리산에서 실족사한 여루시인이여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당신의 뒤로 오늘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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