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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 모종을 하며

기사입력 2017-07-07 14:53

소 쟁기로 갈아엎을 수도 없는 경사진 자투리 땅. 아부지의 호미 날이 구석구석 파헤쳐 엎었다. 허기를 채워줄 양식거리는 아니지만 들기름 뽑아낼 들깨 포기 모종을 심기 위해서였다.

줄 맞출 것도 없이 대충 사방 두 치 간격, 한 뼘 넘게 웃자란 들깨 모종을 길게 뉘어가며 흙 속에 묻었다. 대엿새쯤 지나 하얀 뿌리 자리 잡고 진녹색 초액 빨아올리면 시들해 늘어져 있던 이파리가 서서히 펴지면서 일어선다. 한 달이 지나면 밭이 거의 가려질 정도로 마디도 키워 올리고 잎도 제법 너풀너풀거린다.

한여름 장맛비 맞고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 들으며 줄기 살찌우고 선선한 바람 내려오면 깻잎 점점 넓게 펴 햇살 담고 두서너 달 후면 깻송이 올려 세우고 새하얀 깨꽃이 피어난다. 그 사이 꿀벌들은 분주하게 깨꽃을 넘나든다. 깻잎을 스치면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퍼진다.

엄니는 틈나는 대로 깻잎을 따서 가지런히 편 다음 실로 정갈하게 묶어 장아찌를 담그신다. 남은 깻잎들은 한여름 뙤약볕에 넓적하게 몸을 펼쳐 알뜰히 새벽이슬 쓸어 담고 가을 햇살 듬뿍 받아 노릇노릇 여물어 간다. 단풍 들 듯 노랗게 깻잎 색깔 물들면 낫으로 포기를 베어 깨알 쏟아질까 조심조심 고이고이 누인다.

일주일 후쯤 깻잎이 까맣게 마르면 도리깨와 부지깽이로 두들기고 털어 잿빛 토실토실한 알갱이를 알뜰히 모아 담는다. 바깥마당 우물가에서 깨끗하게 물에 헹구어 멍석에 펴 말린 알갱이를 깨끗한 자루에 담아 읍내 방앗간으로 간다. 큰 가마솥에 달달 볶은 뒤 무겁게 눌러 짜내는 들기름.

그렇도록!

아부지가 해오셨던 들깨 모종을 아직까지 대를 이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심어왔다. 아부지 돌아가신 후 34년 동안의 설움까지 안고 여물어온 깨알들. 그리움 때문일까 아부지의 호미 날을 기억하는 밭에서 키운 들깨는 늘 진한 맛이다. 자식들 위로하는 아부지의 향기처럼 입 안 구석구석 고소함으로 가득 채워준다. 분명 아부지의 너그럽고 푸근한 영혼이 담겨져 있는 향기다.

올해도 그렇게 아부지를 생각하며 들깨 모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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