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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의 추억

기사입력 2017-04-26 17:56

▲집앞에서 멀리보이는 불암산의 자태(양복희 동년기자)
▲집앞에서 멀리보이는 불암산의 자태(양복희 동년기자)
웅장하게 펼쳐진 겹겹의 산속에는 지난날의 기억들이 어른거렸다.

미국에서 돌아와 자리 잡은 곳이 태릉과 멀지 않은 퇴계원이었다. 복잡한 도심과는 거리가 먼듯하고 경기도가 시작되는 서울의 끝자락이다. 여기저기 뚫려있는 도로와 교통량이 그나마 적고 어딘가 모르게 미국의 정서가 남아있는 듯해서 선택한 곳이었다.

더구나 공기가 맑고 쾌청해서 바로 옆 서울과는 비교가 되는 곳이었다. 아파트 앞에는 용암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조금 멀리 시야에는 웅장하게 드리워진 불암산의 자태가 지난날의 추억들을 불러일으켜 잠자던 동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대학 1학년 시절부터 알게 된 남편의 절친한 친구 여섯 명이 있었다. 그들은 육의 제라는 이름을 맺고 가족처럼 때로는 의형제처럼 젊은 시절 함께 청춘을 불태웠다. 그중에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멋들어진 친구 하나가 영어실력이 유창했다. 그 친구는 유독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두 눈에 색기를 품으며 영어로 친절을 베풀었다.

더구나 집안도 아주 부유해서 수원에서는 제법 유지였으며, 집도 그 흔치않은 99칸 한옥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친구 어머니는 상당한 인텔리로 그 옛날 이대 나온 그야말로 멋과 지를 함유한 여성이었다. 아버지 역시도 고위급 관직에서 오랜 세월 자리를 해 집안에 명성은 널리 알려진듯했다. 그러나 그 친구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처를 사별하고 만난 후처라고 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 친구 어머니는 기품을 소유한 훌륭한 어머니로 기억이 되었다.

불암산 일대가 그때는 거의 그 친구 집안의 것이라고 했다. 남편의 의형제들과 함께 필자도 불암산에 있는 유스호스텔이라는 곳으로 1박 2일 MT를 갔다. 그곳이 남편 친구 집안의 소유였기에 별 불편함이 없이 여기저기 편안하게 즐기며 저녁 내내 이야기꽃을 피웠다. 널찍한 마당 한가운데에 장작불을 지펴대고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손뼉 치고 노래하며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밤을 지새웠다.

여기저기 산속에도 어슴푸레 어둠이 몰려오고 그윽한 산 내음과 나무들의 속삭임이 바람소리에 살랑대면 초저녁의 정서는 설렘을 더해주었다. 기타를 치며 부르는 청춘들의 불타오르는 젊음의 노래는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활기를 더해주었고 모두의 얼굴에는 시뻘겋게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살아있는 붉은 피의 들끓는 젊음이었다.

모두들 나이를 먹고 하나둘 가정을 이루기 시작하며 친구들 각자는 자기의 삶에 열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젊은 만남의 시간들은 차츰 횟수를 줄여갔고 그저 가끔씩 전화로만 소식을 주고받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황당한 연락이 왔다. 그 가장 잘생기고 부유했던 불암산의 장손이 객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무슨 날벼락 영문인지 모르니 일단은 달려가야만 그 정확한 소식을 알 수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의형제가 함께 모였다. 40을 넘기지 못한 새빨간 청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상주는 다름 아닌 5살 배기 어린 남자아이, 그리고 7살짜리 여자아이를 남기고 잘생긴 남자가 훌쩍 그렇게 떠나갔다. 미망인은 고인과는 10살 이상 차이나는 가녀리고 앳된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그 친구의 두 아이 엄마였고, 의형제 모두는 처음으로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어색한 자리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고인이 지난날 살아온 과정들을 하나밖에 없던 남동생에게서 겨우 들을 수가 있었다. 그 친구는 젊은 시절 명동에서 아주 근사한 칵테일 바를 운영했고, 그곳에서 늘씬하게 크고 멋들어진 한 여성을 알게 되었다. 키가 크고 이국적인 그 친구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멋진 여성이었다. 필자는 그 여자친구를 어디선가 어렴풋이 한번 본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두 사람은 진실로 사랑을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그 후로 그 친구는 집을 나와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깊은 근심에 쌓였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결국 엇나가는 관심 속에서 부잣집 장남이 형편없는 떠돌이로 객지 생활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그 젊은 여인과의 만남을 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육의 제의 가장 맏형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잊지 못했다. 불과 몇달 전쯤에 돈을 조금만 융통해달라고 연락이 왔었다는 것이다. 그 형은 영문을 모르고 모처럼 전화해서 돈을 요구하니 냉정하게 자르고 말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고인은 폐병이라는 몹쓸 병으로 피 같은 나이에 가장의 책임감은 뒤로한 채 어린 자식들과 젊은 아내만을 남기고 이 세상 하직을 한 것이다.

그 장례식 이후로는 고인의 남은 가족도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젊은 여자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머니와 남은 동생이 미국 LA에서 조촐하게 산다는 소식만을 어렴풋이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던 재산은 어디론가 풍비박산이 나고 지금의 불암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의 웅장함만이 초라하게 다가와 지난날의 모든 것들이 그저 덧없음으로 느껴져왔다.

결국 무엇이 문제였을까? 부라는 많은 재산과 그 철저했던 집안의 가풍과 명예가 결국 자식을 가차 없이 낭떠러지로 몰아간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날에 숱한 의문점만 외롭게 남아있었다. 지나온 시간, 자식들을 키우며 견뎌 온 세월 속에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성찰이 남기도 한다. 어찌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알 것이며 뱃속으로 난 자식이라지만 부모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또 자식 교육인 것만 같다.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멀리 바라다 보이는 불암산의 웅대한 자태가 홀연히 젊음의 추억을 가져다준다. 또 한때의 피 끓는 과거가 어쩌면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느끼게도 해주며 잠시 회한도 불러일으켜준다. 결국 돈도 명예도 어느 순간에 다 그렇게 없어지고 마는 헛된 것이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삶의 뒤안길에서 그저 순리대로 욕심내지 않고 남은 인생의 색깔을 곱게 물들여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이라고 자위를 해본다.

그 옛날, 풋풋함이 넘치던 청춘 시절, 그 잘생겼던 키가 크고 이국적인 한 남자가 불암산 꼭대기에서 윙크를 하며 미소를 짓는다. 한껏 다하지 못한 세상 아쉬움만 남는다고 씁쓸한 고뇌와 여운을 남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생생한 소리로 깔깔거리며 젊음을 논하고 싶다고 불암산 자락의 추억이 손짓을 해왔다.

시간은 흐르는 것, 남아있는 삶 앞에 최선을 다하며 후회 없이 살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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