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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다는 것 PART5] 그 정도라면, 혼자 살아도 좋아

기사입력 2015-07-15 11:12

시중에 나도는 ‘혼자 사는 법’에 관한 어느 자기계발서는 무려 마흔여섯 가지의 과제를 제안한다. 목차가 온통 ‘~하기’로 빽빽하다. 하긴, 목록대로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 혼자 살기는 이미 성공적일지 모른다. 마흔여섯 개를 외우느라 지루할 틈이 없을 테니까.

나는 그 방대한 과제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광야를 내달리는 초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히, 책의 저자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만약 다 해냈다면 책 따위 쓰는 대신 가부좌를 틀고 하늘로 훨훨 올라갔을 것이다. 숙제를 내팽개친 패배감으로 뒤돌아서서 툴툴거리는 게 아니다. 마흔여섯 가지를 빠짐없이 해내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나 빡빡하다.

평생 독신을 고수하면서 ‘혼자 살기’에 나름대로 노하우를 간직한 나는 딱 세 가지를 추천한다. 그 정도라면 삶이 제법 풍성해질 테고,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첫 번째

:

말 걸기

“거기 어떻게 올라갔니?”

영국 런던에 갔을 때다. 처음 그곳을 찾은 사람답게 버킹엄궁전으로 갔다. 왜 있잖은가. 파리에 갔다면 루브르박물관을 봐야 하고, 베이징에 갔다면 자금성에 들러야 한다는 식의 이른바 ‘촌놈 관광 리스트’. 버킹엄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은 리스트 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필수 코스. 그곳을 놓칠 수는 없었다.

나 같은 촌놈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날따라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덩치 큰 서양인들 틈바구니에서 교대식을 구경하겠답시고 까치발을 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결과, 좋은 곳을 발견했다. 2m 조금 넘는 장벽이었다. 그 위라면 멀리까지 훤히 보일 터였다. 가벼운 몸으로 두 손을 짚고 풀쩍 뛰어 벽 위에 걸터앉았다. 또래의 금발 여성이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어떻게 올라갔느냐고. 내 자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두 가지다. 첫째, 영어를 아주 잘하지는 못한다. 회화 쪽은 특히 시원찮아서 대답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가녀린 여성에게 “점프!”라고 말할 수도 없고…. 둘째,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머리카락만 금발이지 메릴린 먼로나 니콜 키드먼 같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긴 말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다. “원한다면 내 손을 잡아” 하면서. 금발 여성은 한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잠깐 생각하더니 곧 손을 잡았다. 손에 힘을 줘 끌었고, 금발의 그녀가 금방 딸려 올라왔다. 곁에 앉고는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촌놈 리스트 ‘대화’ 편의 1번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어디서 왔니?”

금발은 스웨덴에서 왔다고 했다. 어릴 때 죽어라 외운 그곳, 수도 스톡홀름에서. 다시 말하건대 매릴린 먼로는 아니었다. 다만, 처음 본 남자 손을 잡은 게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는 게 꽤 귀여웠다(이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털어놓으면 북유럽 여성답게 몸매가…).

남한에서 왔고 이름은 무엇이고 하며 주절거렸더니 금발은 ‘잉그리드’라고 이름을 밝혔다. 찬스를 놓칠쏘냐. 촌놈답게 물었다.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가 많이 웃었다. 그러면서 성은 요한손이라고, 영어식으로 조핸슨이라 불러도 좋다고 했다.

‘그 인연으로 금발의 잉그리드와 동서양을 넘나들며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다가 사랑하였으므로 헤어졌네라…’고 하면 거짓말일 게 뻔하고, 이실직고하면 꽤 오랫동안 이메일을 나눴다. 아무리 못해도 1주일에 한 번은 쓰거나 읽은 것 같다. 손꼽아 보니 5년을 그랬다.

편지가 끊긴 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검은 머리 여성에 사로잡혀 금발을 잠시 잊었고, 그 틈에 왕래가 뚝 끊겨 버렸다.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은 잉그리드의 한마디 말에서 비롯됐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물어주지 않았다면 나의 5년은 훨씬 초라하고 삭막했을 것이다. 잉그리드 또한 “어디서 왔느냐”는 나의 물음을 반겼으리라 믿는다. 장문의 영어 편지를 꼬박꼬박 보내온 것을 보면. 아, 참 좋았다. 편지를 읽을 때, 편지를 쓸 때. 읽을 때마다 반가웠고 쓸 때마다 흥분됐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그토록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 혼자 산다면, 그래서 삶이 건조하다면 산책 도중에, 여행 도중에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를 권한다. 가볍게 툭 던진 한마디가 삶을 한결 싱그럽게 만들지도 모른다. 비밀을 밝히면, 낯선 사람과 시답잖은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우리네 삶은 이미 풍성해져 있다.

물론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먼저 소재가 있어야 한다. 생뚱맞은 말을 마구잡이로 던질 수는 없는 노릇. 상황과 형편에 맞지 않는 뚱딴지급 의문문은 상대의 눈을 동그랗게 뜨게 할 뿐 미소 짓게 만들지는 못한다. 구체적 방법까지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란데, 어쨌든 제법 신중하고 현명해야 한다.

혹시 “뭐라는 거야?” 하면서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다는 식으로 무시할지도 모른다. 경험에 비춰보면 열에 한 번은 그럴 것이다. 겁낼 것은 없다. 별 쌀쌀맞은 사람 다 봤다는 식으로 역시 무시하면 된다. 언제 또 볼 거라고….

두 번째

:

취미 살리기

주위에 변변한 취미 하나 없는 이가 뜻밖에 많은 데 종종 놀란다.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술 마시기”라고 답하는 사람도 놀랍기는 마찬가지. 술 마시기는 취미가 아니다. 숨어 있는 명주를 찾아 방방곡곡 훑는 수준이 아니라면,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것은 생활일 뿐이다. “사람이 좋아 마신다”는 정도로는 취미라고 이름 붙이기가 민망하다는 뜻이다.

취미에는 나름대로 철학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뭔가를 좋아한다면 왜 좋은지 A4 용지 댓 장 안팎으로 늘어놓을 정도는 돼야 한다. 그쯤은 돼야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내 친구는 야구를 좋아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관중석에서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응원해서 방송 카메라에 잡혔을 정도다. 친구는 말한다. 야구는 팬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한다고. 그러므로 승패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꿈과 희망은커녕 몹쓸 인생관을 강요할 뿐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야구는 최선을 다할 뿐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야구라고. 현실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으니 그래서 야구를 사랑한다고. 나는 친구의 야구관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도 알고 있다. 그 전까지는 클래식에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인지 ‘지고이네르바이젠의 사라사테’인지도 몰랐다니 더 할 말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봄의 제전’을 들은 뒤로, 꼼꼼히 관련 서적까지 쓸 정도가 됐다. 몇 권 팔리지는 않았지만 어디 그게 중요한가. 공교롭게도 그 남자는 나와 동년배에다가 홀로 지내는 삶의 방식까지 같은데, 그 모습이 결코 측은하지 않다.

함께 술을 마시고 그네 집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가 아침에 들려오는 모차르트 음악 소리에 눈을 뜨면서 그만 탄성을 낮게 내지르고 말았다. 멋지네! 친구가 따라 주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좋은 게 없는데 뭐 어쩌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인생관을 먼저 둘러볼 일이다.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면밀히 돌아보다 보면 어울리는 뭔가가 손에 잡힐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게 취미가 되고, 그게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세 번째

:

동아리 만들기

취미가 생겼다면 동아리 만들기도 생각해봄직하다. 나는 앞서 말한 야구 좋아하는 친구의 동아리에 몸담고 있다. 열심히 참석하는 회원은 모두 여덟. 응원하는 팀이 똑같다. 모두 잠실야구장 3루 관중석에서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형태는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의사고, 어떤 이는 월급쟁이다. 방송 외주 제작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후배도 있다. 이 친구가 아주 걸물이다. 덕분에 프로야구 선수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도 있다. 지금도 내게는 그 추억이 작지 않은 자랑거리다.

동아리 들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인터넷 뒤지기. 내키지 않는 분들도 많을 줄로 안다. 생면부지 사람들 앞에 나서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나부터 그랬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거니와 겁도 많아서 함부로 마우스를 놀리지 못했다. 어린애들 노는 판에 괜히 끼어드는 것 아닌가 싶고, 혹시나 못된 사람들 만나면 어쩌나 싶고….

우리 동아리 만드는 데 결정적인 몫을 했던 프로듀서 후배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직접 나서면 됩니다. 동아리 만드는 게 어렵다면 어렵지만, 쉽다면 또 쉽거든요. 가장 힘든 것은 사람 모으기겠지요. 취미도 맞아야 하고 시간대도 맞아야 하고 생각도 맞아야 하고…. 우선, 두세 명쯤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수월하지 않을까요? 큰 욕심 내지 말라는 거지요. 그렇게 만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모양새가 갖춰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동지들이 뭉치게 돼 있습니다.”

동아리가 생기면 뭐가 좋을까? 하나마나한 대답이겠지만 정답은 ‘여러 가지로 좋다’이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같은 것에 대해서 갑론을박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 흔하겠는가. 건전한 취미가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어느 책에서 읽은 ‘친구 사귀는 데 필요한 자세’를 덧붙이면 이렇다.

일일이 따지지 말라. 이 말 저 말 옮기지 말라. 사생결단 내지 말라. 예스, 하고 받아 들여라. 육체 접촉을 자주 하라. 팔팔하게 움직여라. 구구한 변명 늘어놓지 마라. 10%는 베풀면서 살아라….

참고가 됐으려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성인군자가 되라는 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동네 바보처럼 굴어라 싶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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