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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의 문화공감] 삶꾼 무애의 이야기

기사입력 2015-06-12 16:31

임성빈의 바둑 이야기, 그 세 번째

▲유창혁(오른쪽)과 요다의 제1회 삼성화재배 결승 대국

필자의 고교 동기동창들이 동창회를 창립한 것은 졸업한 지 13년째 되는 1975년 3월이다. 당시 L동문이 사장으로 있던 시내 S호텔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동창회는 첫 번째 행사로 바로 다음 달인 1975년 4월에 역시 같은 S호텔에서 제1회 동창회 바둑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때 후배인 프로기사 홍종현 4단(당시)에게 지도를 부탁하였으나 선약을 이유로 김동명 4단(당시)이 대신 왔다. 당시 기력이 4급(현 아마 2단) 정도였던 L사장은 바둑에 한창 심취하여 동문 강자 중의 한 명인 인하대 L교수와 4점을 놓고 자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4점을 놓고도 쩔쩔매는 그 L교수가 김 사범에게 오히려 2점을 놓고도 지는 것을 보자, 프로바둑계를 잘 모르던 L사장은 김 사범을 한국바둑계의 대단한 고수라고 생각했는지 즉시 S호텔의 지도사범으로 위촉하고 호텔의 과장급에 해당하는 급여를 지급하도록 했다. 과장급이라고는 하나 그 액수가 프로기사들 중 최고였던 조훈현 국수의 수입에 버금갈 정도여서 많은 기사들이 부러워하였다고 하니 당시 프로기사들의 수입이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덕택에 필자를 비롯한 동문 바둑애호가들은 틈만 나면 S호텔에 들러 김 사범의 지도를 받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1974년에 시작된 한국기원 기사파동이 계속되던 때라 갈 곳이 마땅치 않던 다른 프로기사들도 S호텔에 자주 들렀다. L사장은 이들에게도 다과를 제공하고 밥을 자주 사는 등 대접을 잘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지도를 받을 수가 있어 필자의 경우 양상국 4단(당시), 장두진 2단(당시) 등에게도 종종 지도를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 L사장이 언제부터인가 바둑 두기를 꺼려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기사파동이 끝나고 한국기원으로 복귀한 기사들이 고맙다고 L사장에게 실제 실력보다 몇 단 높은 아마단증을 증정한 것이었다. 그 단증을 벽에 걸어놓고 옛날 치수대로 두자니 단증을 볼 낯이 없고 단증대로 두자니 판이 짜이질 않아 그랬던 것이다.

제2회 대회는 다음해인 1976년 2월, 제3회 대회는 같은 해 9월에 열렸다. 1977년에는 S동문이 초동극장 옆에 초동기원을 개원하여 제4회 대회는 그해 7월 자연스럽게 초동기원에서 열렸다.

그때 그 기원에는 김좌기 3단(당시)이 지도사범으로 있어서 필자는 틈만 나면 기원에 들러 처음에는 4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3점으로 지도를 받았다. 그 덕분인지 한 해를 건너뛰고 1979년 5월에 열린 제5회 대회 때는 필자가 A조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 후 3년을 건너뛴 1982년에 명동에서 C백화점을 운영하던 K동문이 백화점 내에 동창회사무실을 제공하면서 그 기념으로 제6회 대회가 열렸으나 그 후에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2년 11월에 기우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매월 둘째 토요일 오후에 모이기로 했는데, 이 전통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모이는 장소는 처음에는 선릉역 부근의 H 바둑살롱이었으나 1993년 10월, Y동문이 신사동(新沙洞) 부근에 회돌이라는 기원을 개원하면서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기원이 2001년 문을 닫자 진양상가에서 화원을 하던 P동문이 2002년 초 화원 인근에 진양기원을 개원하였으나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 후에는 지하철 서초역 부근에 있던 한일기원에서 모였다. 당시 한일기원에 지도사범으로 나오던 김수영 7단은 인사를 하면서 필자가 한국바둑학회 회장이라고 밝히자 한국바둑계를 강력히 비판하며 필자와 같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국기원을 개혁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열변을 토하곤 하였다.

필자와는 동갑내기인 그가 암으로 너무 일찍 타계한 것은 한국바둑계로서도 상당한 손실이라고 생각된다. 그 후 2008년 11월, 전에 초동기원을 하던 S동문이 다시 양재역 부근에 청석기원을 열어 우리 기우회는 지금까지 이 기원에서 모이고 있다.

필자는 딸 없이 아들만 넷으로, 바둑을 가르칠 기회를 찾다가 1982년경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동시장 부근에 한국기원 영동지원이 개원되어 김좌기 사범이 지원장으로 왔기에 아들들을 데리고 그곳에 다녔다. 그러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만두었는데 큰아들만은 약간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이나마 지속적으로 바둑을 두어 현재 기원 7~8급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 아들(필자의 손자)에게도 꾸준히 바둑을 가르치더니 최근에는 바둑학원까지 보내 중학교에 들어간 올해 중에는 제 애비를 추월하여 아마 유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필자가 바둑학과 설립을 추진 중이던 1996년 추석 때는 한국기원 사무국장 정동식 5단과 TV에서 3점으로 기념 순장바둑을 두어 비겼는데, 해설을 맡았던 권경언 6단이 명절 때 화국(和局)은 길조(吉兆)라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같은 해 11월 29일에는 바둑학과 교수로 내정된 정수현 8단(당시)과 함께 신라호텔에 가서 필자가 왕 팬인 유창혁 9단의 제1회 삼성화재배 최종 결승국을 관전하였다. 이 바둑은 중반까지 흑을 잡은 유창혁 9단이 필승의 국세였으나 후반에 터무니없는 실착이 나와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에게 1집 반 역전패를 당한 것을 필자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해했다.

그래서 해설을 맡았던 조훈현 국수, 중앙일보 박치문 바둑전문위원, 그리고 필자보다 더한 애기가중 한 명인 S대의 K교수 등과 함께 신라호텔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포커를 하며 화풀이 겸 뒤풀이를 했던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조 국수는 그 후 명지학원 바둑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초빙하여 필자가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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