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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공감] 삶꾼 무애의 이야기

기사입력 2015-03-06 17:41

내가 만난 영화, 그 세 번째

음반을 모으면서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은 물론 분야별로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게 되자 이제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것까지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전에 소개했던, 중학교 때 본 <사랑의 종이 울릴 때(Five Pennies)>라는 영화의 OST(Original Sound Track)로 음반가게에만 가면 한 번씩은 꼭 확인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1997년쯤 미국에 갔을 때, 그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틈만 나면 음반가게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타워 레코드 체인점에 들러 음반을 보다가 우연히 한쪽 구석에 비디오 코너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비디오에 별 관심이 없었고 집에 VTR조차 없었지만 그 전에는 음반가게에서 비디오를 파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지라 호기심도 생기고 또 시간도 좀 있고 하여 그쪽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아, 그곳에 그렇게 찾아다니던 <사랑의 종이 울릴 때>가 그것도 영화까지 볼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로 있지 않은가.

▲초원의 빛

우연히 조우한 ‘사랑의 종이 울릴 때’의 감동

그뿐이 아니었다. 청순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젊은 시절 나의 우상 중 하나였던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 ‘녹색의 장원(Green Mansion)’과 나탈리 우드의 ‘초원의 빛’도 있었고 이름만 들어도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마릴린 먼로의 ‘나이아가라’와 ‘돌아오지 않는 강’, 진 켈리와 데비 레이놀즈의 춤과 노래가 너무나도 신나던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도 있었다. 또 안동에서 군 복무 중 휴가를 가던 길에 기차시간이 남아 안동극장에 들어가서 보다가 기차시간이 되어 중간에서 나오는 바람에 늘 결말이 궁금했던 ‘피와 장미(Blood And Roses)’라는 영화도 있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옛날의 명화들이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비디오에는 워낙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터라 이 순간은 필자에게 또 하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잊혀졌던 영화에 대한 향수가 다시 되살아나면서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나 해야 할까, 타워 레코드에서 이들 영화 외에도 전에 본 기억이 있던 상당수의 비디오테이프를 더 샀고 귀국해서는 바로 VTR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국내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주로 인터넷을 통해 미국에서 옛날 영화들을 사 모은 것이 200여 개를 넘어섰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우리나라에도 옛날 영화들이 비디오로 출시되고 있다는 것, 비디오 테이프의 총판들이 황학동 도깨비시장에 모여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어 이때부터 틈나는 대로 주로 황학동과 그 외에도 비디오를 파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50, 60년대의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유럽영화의 경우, 꽤 인기가 있었던 것들 중 국내에서는 물론 인터넷에서도 팔지 않는 것이 여러 개 있었으나 얼마 전 그들 중 몇 가지는 일본에서는 발매되었음을 알게 되어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와 ‘부베의 연인’, ‘지하실의 멜로디’를 일본어 자막판으로 구했고 그 후 일본을 자주 다니던 고교동창 K군을 통해 ‘형사’와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도 구할 수 있었다.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

알리다 켈리가 구슬픈 목소리로 부르는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라는 주제가가 흐르는 가운데 고도(古都) 로마의 한 주택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도둑이 도망가는 장면으로 ‘형사’라는 영화는 시작된다. 임신한 애인에게 목돈을 마련해 주려고 도둑질을 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돼 결국 경찰에 잡혀 연행되어 가는 애인 디오메데의 이름을 절규하며 뒤쫓아가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는 영화도 영화지만 주제가가 엄청나게 유행했다.

한편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본 미국의 흑백 인종갈등을 그린 영화로 백인소녀를 사랑한 죄로 흑인소년이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요행히 피부가 흰 친형이 동생의 복수랍시고 백인처녀들을 범하고 다니면서 범행이 끝날 때마다 동생의 하모니카로 ‘갈색의 블루스’라는 주제가를 연주하는, 영화는 그저 그렇고 그랬지만 가슴을 저미는 듯 파고드는 주제가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된 아버지께서도 무척 좋아하셨던 영화라 다시 보는 감회가 더욱 깊었다.

▲돌아오지 않는 강

명화 4000여 장 수집의 재미

그런데 영화 수집을 이렇게 구입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만난 영화(1)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10 수년 전의 몇 년간은 KBS, MBC, SBS, EBS 등 각 TV 방송이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 시간 등에 방영하는 영화들 중 필자가 소장하지 않은 영화는 거의 모두 녹화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신문이나 TV를 통해 영화 방영계획을 확인하여 예약녹화를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녹화해 놓은 영화도 400장은 훨씬 넘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명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또 그들 중에는 외국영화뿐 아니라 국산영화도 꽤 많이 있고 국내에서 방영은 되었지만 비디오나 DVD로 출시되지 않은 것들이 상당히 많다. 최근에는 비디오 대신에 DVD를 모으고 있지만 이제는 50, 60년대 영화나 그 이전 것들뿐만 아니라 그 후 최근까지 나온 영화들 중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 중 구할 수 있는 것은 대개 다 모았다. 녹화한 것들까지 포함하면 이것 역시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족히 4,000여 장은 되는 것 같다. 가끔 필자에게 그 영화들 다 보느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필자는 집에 있는 사전을 그 안에 있는 단어들 다 찾아보려고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하곤 한다.

그분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옛날 영화 생각이 날 때 그것을 찾아서 다시 보며 음미하는 재미를 모르실 것이다. 필자는 주변에서 옛 추억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분이 계시면 언제든지 빌려드린다. 그리고 경복궁 옆 사간동에 있던, 또 다른 고교동창 K군이 운영하는 화랑 베아르떼에서 매월 1회씩 교양미술 강좌를 하던 큐레이터 P씨의 제안에 따라 2008년 12월부터는 그 화랑의 고객과 고교동창들을 대상으로 화랑이 익선동으로 이전하게 된 2012년 12월까지 강좌가 끝난 후 매월 한 편씩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임성빈 월드뮤직센터 이사


1944년 서울 출생.

아호 무애(無碍). 경기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 서울대대학원 교통공학 박사. 서울대, 명지대 토목공학과 및 교통공학과 교수 역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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