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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1955년生 블루스③ ]“우리끼리 잘하자”

기사입력 2015-01-16 16:09

총 인원 1300여 명, 1955년생 최대의 모임 ‘고양을미회’

1955년생이 모두 1300여 명, 체육대회를 열면 500~600여 명의 인원이 모이는 매머드급

모임이 있다. 그것도 지역 모임이 그렇다고 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고양시에 자리한 고양 을미회가 그 주인공. 고양시 1955년생들의 추억과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고양 을미회는 올해로 22년째를 맞으며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선 아름다운 동행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고양 을미회가 말하는 모습, 그리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들어본다.

1992년에 결성된 고양 을미회는 올해로 22년째 운영되고 있는 고양시 토박이들의 탄탄한 지역 모임이다. 아니, 이미 단순한 지역 모임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롤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고양 을미회의 시작은 고양시 안의 네 개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모여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열 개 초등학교의 동창생들이 모인 커다란 커뮤니티로 진화했다. 열 개의 초등학교는 능곡(37회)·대화(16회)·백마(16회)·벽제(20회)·삼송(8회)·성석(20회)·송포(31회)·신도(38회)·일산(41회)·행주(19회)로, 회원들은 모두 1955년생이다.

초등학교 그 시절 체육대회를 맛보다

가장 큰 행사는 연 1회 열리는 체육대회다. 500~600여 명에 달하는 을미회 소속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뤄지는 이 체육대회는 매년 꾸준히 열리면서 을미회 사람들을 모으고 서로의 친목을 다지는 대규모 연례 행사다. 인원이 인원인 만큼 공원 축구장 등의 넉넉한 공간을 빌려 진행되는 체육축전은 군악대의 지원을 받기도 하고 다른 큰 규모의 모임들과 친선 축구대회도 갖는 등 소박한 수준을 넘어서 지역 축제의 성격까지 갖게 됐다. 이 자리에서 1955년생 동갑들은 서로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며 즐거운 장난을 치기도 한다. 마치 초등학교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어려운 시절, 끈끈한 인연이 삶의 즐거움이었다

고양 을미회 사람들이 기억하는 어렸을 때의 고양시는 아직 신도시와 콘트리트가 없었던 논

밭의 농촌 풍경이다. 전방이라는 척박한 땅에 만들어진 논과 밭의 마을.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 먹으며 지내던 시절이었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추억에는 생활의 어려움과 어려움을 극복 하기 위해 서로를 도우면서 생겨난 끈끈한 친분에 관한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1968년 졸업한 우리들은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는 마지막 세대죠. 그때 우리가 갈 수 있는 고양시 안의 중학교는 세 개밖에 없었어. 학교가 적다 보니 입학 시험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었지.”

고양 을미회 이강식 회장은 을미회 회원들의 우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해를 거듭하면서 차곡차곡 쌓아진 것이라고 자부했다. 고양을미회는 슬픈 일에 같이 슬퍼하고, 기쁜 일에 같이 기뻐하자는 게 그들의 ‘교훈(校訓)’이었다. 마치 ‘다정다감(多情多感)’이 병인양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지역모임 있으면 나와보라는 듯이, 을미회를 위한 행사라면 ‘열성 그 자체’였다.

사람노릇 잘하자는 것이 모임의 큰 이유

이렇게 잘 뭉친 데는 무엇보다 을미초등학교(?) 출신 덕이 크다. 그만큼 모교 초등학교 제쳐두고 을미회를 위한 일이라면 이해타산을 할 게 없이 열성이다. 한국 사람들은 50만 넘으면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족보를 찾는다고 한다. 연어가 어머니의 강(母川)을 찾아 회귀하는 것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조금씩 느낄 나이가 된 것이다. 38세에 만나 이들은 이제껏 대처생활을 하면서 표준말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이들이 만난 자리에는 수 십년 만에 들어보는, 잊고 있던 사투리와 방언(탯말)이 춤을 춘다. 담방구, 공기, 공치기, 장정놀이, 대장놀이, 자치기….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몇 안 되는 놀이들은 1955년생들의 추억을 되새기게 만드는 열쇠들이다. 그리고 털내기. 고양시의 명물 음식인 털내기는 미꾸라지와 국수를 넣고 끓여낸 매운탕이다. 가난한 시대가 만든 음식이기도 한 털내기는 고양 을미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미꾸라지 말고도 온갖 잡어들을 다 넣어서 끓이고 국수로 양을 불린 음식이었다. 옆 집에서 가꾸는 밭에서 몰래 가져온 깻잎을 털내기에 넣어 먹던 맛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만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기도 했다.

이명옥 봉사분과장은 “초창기 을미회 모임 때는 몇 가지 소싯적 추억이 전부라 할 만큼 화제도 궁해 만나면 그저 술잔만 주고받다 자칫하면 말싸움이 나고 감정을 사기도 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복순 산행분과장이 “하지만 우리들은 돈 있고 없고 떠나,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고만고만한 곳에서 모여 고만고만한 삶을 나누며 예의 좀 알아서 사람노릇 잘하자는 것이 모임의 큰 이유”라 자신했다.

“누가 손가락질하는 사람 없고 추억 쌓기 호사를 누리는 이 을미회원들은 속칭 ‘겡우(표준말은 경우나 경위)’를 잘 안다는 것이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지킨다는 것이죠. 우정(友情)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의 트라우마를 잘 감싸줍니다.”

이강식 회장은 이렇게 자부심이 깔린 고양 을미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서로서로 존중해준다는 그자체가 뿌듯하고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겡우’를 잘 아는 1955년생들이 모였다

▲1992년에 1955년생들끼리 뭉쳤다. 1300명이라는 '고양을미회' 거대조직이 된 그들이 앞으로 20년의 미래를 설계하고자 머리를 맞댔다. (왼쪽부터 김복순씨, 이강식 회장, 이명옥씨, 성연배 사무국장, 유형렬씨)

이처럼 고양 을미회 정도로 많은 동갑 친구들이 단합되는 단체는 드물다. ‘이정도 규모는 ’처음’이란 말도 어렵지 않게 듣는 고양 을미회 회원들에게 자연스러운 자부심이 되고 있었다. 고양 을미회의 성공에 힘입어 파주에서도 을미회를 벤치마킹한 단체를 만들었다, 고양시 내에선 고양 을미회의 후배들이 같은 기수들끼리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력

면에선 아직 어느 단체도 고양 을미회를 못 따라오고 있다. 고양 을미회는 체육대회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단체 야유회를 가며 매월 봉사활동을 갖고 있다. 봉사활동은 노인요양 시설, 장애인 시설 등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장학 사업도 시작한 상태다. 이미 단순 친목 모임을 넘어선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강식 회장은 “60세가 된 우리들끼리 만나면 손자들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개인 사업에 대한 얘기도요. 일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 친구들이 노후에 모여서 가족과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공간, 우리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에 요즘 관심이 커요”라고 말했다.

또한 내년에 고양을미회 단체로 회원들의 환갑을 근사하게 치를 계획도 세우고 있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공간’ 필요

거대해진 고양 을미회에서 고민하고 있는 건 미래를 위해서 ‘공간’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성연배 사무국장이 덧붙였다.

“회원들이 모일 수 있는 고정된 공간이 생긴다면 종합적인 정책이 가능할 겁니다. 이익 창출뿐만 아니라 공동구매 같은 수단을 통해 저렴한 생필품을 제공할 수도 있겠구요. 회원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보다 용이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봉사활동을 봐도 기존 봉사활동들이 외부의 기관이나 이슈에 참가하는 식이었다면 앞으로의 봉사활동은 을미회 내부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이뤄져야 할 테니까요. 우리 나이가 나이인 만큼.”

고양 을미회는 이미 고양시 내에 있는 종합병원 다수와 협약을 맺고 회원들에게 의료 편의를 제공해주고자 논의 중에 있었다. 이제 고양 을미회는 미래를 위한 계획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유형렬 기획분과장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인원이 많으니까 그 인원 안에 서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을 거예요. 중요한 건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란 겁니다. 지금 시점이 중요해요. 우리 내부에서 우리의 미래를 위한 각자의 역할 분배가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고 당차게 말했다.

우리 같은 모임은 또 없을 것

“그런데 사실 초창기에는 우리가 미래에 대해 할 얘기 자체도 별로 없었어요. 어, 우리 술 마시러 모였습니다! 아니면 장어 먹고 싶어서요! 그런 식이었지(웃음).”

이 회장의 말대로 정말로 재미있고 즐기기 위해서 모였기 때문에, 고양 을미회 초창기 멤버들은 을미회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났고, 이제는 모임의 비전을 얘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고양 을미회는 진화했다. 그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뿌듯함을 안겨준다. 우리네 삶이 그리 척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멈추지 않고 발전하려는 긍정적 의지를 새삼 확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양 을미회원들은 우정의 금자탑을 앞으로도 30∼40년 차곡차곡 쌓아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의 신념과 가치가 말갛게 무르익어가리라는 바람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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