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로해준 트로트] 문화 전문가와 알아본 꽃중년 트로트 열광 이유 심층 분석

인생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트로트. 꽃중년의 트로트 사랑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다만 지금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과거 ‘애청자’에 머물렀던 이들이 이제는 아이돌 팬덤 못지않은 ‘거대한 팬덤’으로 진화하며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공연장을 채우고, 굿즈를 만들고, 팬카페를 운영하는, 이른바 ‘덕질’의 주체가 된 꽃중년. 이들은 왜 지금, 이 나이에, 이토록 뜨겁게 트로트에 열광하는 것일까.
“임영웅 덕분에 혈액암이 호전됐어요. 의사도 놀랄 정도라니까요.” 대전에서 만난 70대 임영웅 팬은 이렇게 말했다.
EBS ‘PD로그-덕질하기 딱 좋은 나이’에 등장한 영탁 팬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자녀를 떠나보낸 뒤의 공허함, 배우자를 먼저 보낸 상실감. 빈둥지 증후군의 외로움을 채워준 것이 바로 영탁이었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트로트 가수의 노래, 아니 그 존재 자체가 정말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더 본질적인 질문. 이들은 왜 중년의 나이에 다시 누군가의 ‘팬’이 되는 삶을 선택했을까.
EBS ‘PD로그-덕질하기 딱 좋은 나이’ 편을 연출한 문동주 PD와 김정섭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산업예술대학원 문화산업예술학과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 꽃중년의 ‘이유 있는 트로트 팬덤’을 들여다봤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등장
트로트 열풍의 변곡점은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의 확산과 함께 형성됐다. TV조선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시리즈, MBN ‘불타는 트롯맨’, KBS 2TV ‘트롯 전국체전’ 등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202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젊고 매력적인 가수들이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모습은 꽃중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는 트로트가 추억의 음악을 넘어, 스타 시스템과 결합한 새로운 콘텐츠로 재탄생했음을 보여준다.
김정섭 성신여대 교수는 “K-팝 중심의 음악시장이 10~30대에 집중되면서 중장년층이 즐길 콘텐츠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등장했다”며 “꽃중년 세대의 삶은 신나고 달달하면서도 동시에 슬프고 애절한 양면성을 지니는데,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 구조가 트로트 가사와 맞물리며 깊은 정서적 몰입을 이끌어냈다”고 설명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형식 역시 팬덤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청자가 직접 투표하고 응원하는 구조는 중장년층을 ‘관람자’에서 적극적인 ‘참여자’로 끌어올렸다. 특히 송가인과 임영웅 등을 필두로 자리잡은 ‘내가 선택한 스타’라는 인식은 팬덤 결속을 더욱 강화했다.
문동주 PD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은 중장년층을 명확한 메인 시청자이자 팬덤의 주체로 끌어냈다”며 “이 프로그램들은 트로트를 다시 주목받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장년층 팬덤 문화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는 중요한 시작점이 됐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내일은 미스터트롯’ 종영 이후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임영웅 팬카페 ‘영웅시대’는 약 19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며 트로트 팬덤 가운데 압도적인 규모를 유지하고 있고, 송가인·영탁·이찬원 등 주요 가수들 역시 6만~7만 명대의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트로트 팬덤, 무엇이 다른가?
흔히 중장년층은 장거리 이동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문화 활동에 소극적일 것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 모습은 정반대다. 전국 각지를 따라다니며 공연을 관람하고, 이른바 ‘N차 관람’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정섭 교수는 “꽃중년 트로트 팬덤은 SNS와 스트리밍 중심의 젊은 아이돌 팬덤과 달리 앨범 구매, 공연 관람, 팬카페, 지역 모임 등 오프라인 활동이 활발하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수 임영웅이다. 매년 콘서트를 여는 그는 공연을 보고 싶어도 표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매회 매진을 기록하며 ‘피켓팅(피+티켓팅)’이라 불릴 정도의 치열한 티켓 경쟁이 벌어지고, ‘2025~2026 전국 투어 콘서트’에는 약 25만 2000명이 몰렸다. 2022년 전국 투어 시작 이후 올해까지 누적 관객 수는 91만 5000명에 달한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꽃중년층 가운데 일부는 티켓을 단체로 구매하거나 굿즈를 제작하고 밥차를 지원하는 등 이른바 크게 쏘는 방식으로 응원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큰손’ 소비는 단순한 경제력만으로 설명되진 않는다. 김 교수는 “한 번뿐인 인생을 스스로 즐기고 표현하며 누리겠다는 정서적 자각이 이 같은 팬덤 활동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10월 방영된 EBS ‘PD로그-덕질하기 딱 좋은 나이’ 편은 30대 문동주 PD가 중장년층 팬덤 문화를 직접 체험하며 그 현장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는 영탁 팬클럽 ‘영블스’ 회원들과 함께 활동하고 콘서트에 동행하며 그들의 덕질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문 PD가 주목한 꽃중년 팬덤의 첫 번째 특징은 가수를 향한 ‘절실한 애정’이었다. 랩 파트가 포함된 신곡조차 가사를 출력해가며 따라 부르려는 모습에서 단순한 취향을 넘어선 깊은 몰입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팬 활동이 하나의 ‘공동체 경험’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실제로 일부 팬들은 “가수뿐 아니라 팬 커뮤니티 자체가 좋아 활동을 이어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꽃중년 팬덤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연결된 관계망으로 작동한다. 문 PD는 “중장년층 팬덤은 스트리밍이나 투표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우고 공유하며 함께 참여하는 데 의미를 둔다. 팬 활동은 단순한 응원을 넘어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면서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유대감과 연대감이 젊은 세대 팬덤과는 다른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각자의 사연, 마음의 위로
문동주 PD는 취재 과정에서 개인적인 아픔을 팬 활동으로 극복해나가는 중장년층을 다수 만났다고 전했다. 배우자와 사별한 뒤 큰 상실감에 빠졌던 이가 팬덤 활동을 통해 다시 사람들을 만나며 삶의 활력을 되찾거나, 오랜 시간 병상에 있는 가족을 돌보며 지쳐 있던 이가 팬 활동을 통해 잠시나마 숨을 고르는 사례도 있었다.
문 PD는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런 사연들이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같은 팬덤 안에서 서로의 사정을 알고 공감해주며 자연스럽게 위로와 지지가 오가고 있었다”고 팬덤 공동체의 긍정적 작용을 얘기했다.
이처럼 꽃중년의 팬덤 활동은 사회적 지지와 삶의 의미를 높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팬덤 활동이 활발할수록 공감과 위로, 정보 교류, 실질적 도움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지지를 경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러한 관계망은 일상에 안정감을 주고, 힘든 상황에서는 마음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트로트는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다. 문 PD는 “많은 중장년층이 트로트를 ‘내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노래’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섭 교수 역시 “젊은 시절의 사랑과 이별, 고난과 성취 등 다양한 생애 경험을 떠올리게 하며, 공감과 위로를 제공한다”고 트로트의 정서적 의미를 짚었다.
결국 트로트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감정을 꺼내는 언어에 가깝다.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서로를 이해한다. 그만큼 트로트에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꽃중년의 트로트 덕질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을 넘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트로트를 통해 타인을 응원하면서도 결국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셈이다.
도움말 김정섭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산업예술대학원 문화산업예술학과 교수문화산업·정책, 케이컬처(K-Culture),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아티스트 연구를 수행하는 문화 콘텐츠 분야 학자다. 한국 대중문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케이컬처’를 학문적으로 도입하고 관련 연구를 이어왔다. 저서로는 ‘셀럽시대’, ‘한국대중문화예술사’, ‘BTS의 세계관’ 등이 있다.
도움말 문동주 EBS PD
EBS 소속 프로듀서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PD로그’를 연출하고 있다.
‘PD로그’는 PD가 직접 현장에 참여해 다양한 직업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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