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장마에 미리 떨어져 버린 블루베리

블루베리는 물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물을 오래도록 머금고 있는 건 절대 사절이다. 열매 크기가 비교적 작은 데다 수분을 적게 머금고 있기에 비 피해가 크지는 않은 편이다. 포도는 비 피해를 막기 위한 가림막 시설이 필수지만, 블루베리의 경우는 선택이다. 조생종이나 중생종은 장마철을 피해 수확할 수 있어 인기 만점이었는데, 올해는 장마가 일주일이나 먼저 시작되면서 열매가 익기도 전에 일부는 비에 터지고 땅에 떨어지고 물러버리고 말았다.

그 무엇보다 까다로운 물 관리
세종시 인근 지역은 예부터 큰물도 없고 큰 가뭄도 없고, 온건한 날씨 닮아 사람들 성정도 유순하다고들 했는데, 지난해엔 충청도 지역에 홍수 피해가 유별났다. 날씨가 사나워지면서 사람들 마음도 강퍅해진다며 두런두런 걱정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블루베리를 재배할 때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말 까다로운 작업이 물 관리다. 블루베리 원산지로 친숙한 미국이나 칠레에선 모래밭처럼 물 빠짐이 좋은 곳에서 대규모 블루베리 농장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물을 좋아하는 블루베리 나무는 특별히 피트모스에 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트모스를 검색하면 ‘이탄(Peat)과 이끼(Moss)의 합성어로 습지에서 수천 년 동안 이끼류, 갈대, 화본과 식물 등이 퇴적되어 부분적으로 분해된 물질이다. 주로 북반구의 한랭한 지역에서 채취되며, 양분 보존력, 수분 보유력, 통기성이 뛰어나 토양 개량 및 식물 재배에 사용된다’는 설명이 있다.
100% 수입품인 피트모스는 한번 말라버리면 다시는 물기를 흡수하지 않는 특이한 성질이 있다. 피트모스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화분에선 블루베리가 새들새들 말라 죽곤 한다. 친구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맨땅에 울타리용으로 심은 블루베리는 죽지도 않고 잘 자라건만, 값비싼 피트모스에 심은 블루베리는 잘도 죽는다”며 “피트모스는 업자들 배만 불리는 것 같다”고 혀를 끌끌 차신다.

아니나 다를까, 블루베리는 한 해 수확이 끝나고 나면 나무가 통째로 말라 죽기도 하고, 오래된 가지가 누렇게 변색되는 일이 잦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물을 다룰 때면 죽음과 맞부딪쳐야 하는 것이 가장 당혹스러울 것이다. 블루베리가 병충해에 비교적 강한 과수임을 고려한다면, 충(蟲)이나 균(菌) 때문에 죽기보다는 아마도 외래종이라 우리네 기후나 토양과 잘 맞지 않아 그런 것 같다. 물 부족 아니면 물 과잉이 죽음의 원인일 수도 있겠고.
“블루베리는 죽겠다 마음먹으면 무슨 수를 써도 그냥 죽어버려유.”
블루베리 20년 차 농부도 이렇게 푸념하는 걸 보면, 내 입장에선 명함 내밀기도 민망하다. 제법 규모 있는 농장에선 죽은 나무 자리에 해마다 보식(補植)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에, 가지치기할 때 튼실한 가지를 골라내어 삽목(揷木)한다. 우리 농장도 삽목을 한번 시도해보았는데, 사흘간 서울서 볼일 보고 와보니 물 관리를 제대로 못 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헛수고로 끝난 경험이 있다.

하늘이 내린 물, 땅에서 올린 물
피트모스와 함께 블루베리 농장에는 점적관수 시설 또한 필수다. ‘점적관수(Drip Irrigation)’란 물을 식물 뿌리 부근에 직접 천천히 공급하는 관수 방법이다. 작물 생육에 필요한 만큼의 물만 공급해 물을 절약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다. 한여름 33~34℃를 훌쩍 웃도는 날씨가 지속되면 매일 물을 주거나 적어도 이틀에 한 번꼴로 물을 줘야 하기에, 규모가 크든 작든 블루베리 농장에선 관수시설을 갖추기 마련이다.
나무 크기에 따라 시간당 배수량을 조절해주는데, 배수량 조절은 단추 색깔로 구분한다. 시간당 빨간색은 2리터, 회색은 4리터, 초록색은 8리터씩 물이 들어가는 식이다. 관수시설 관리에는 은근히 손이 많이 간다. 나무가 성장함에 따라 해마다 단추 색깔을 바꿔주는 것도 번잡한 일이고, 배관이나 호스가 터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이기에 늘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터진 곳은 없는지, 막힌 곳은 어딘지 살펴야 한다.
“농사는 물 관리 하나만 잘해도 그냥 먹고 들어가유.”
초보 농사꾼 시절 베테랑 농부가 해준 말씀이다. 당신이 농과대학 다니던 시절엔 한 학기 내내 물주기 실습만 하던 과목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사람이 만든 관수시설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는 못 당해유” 했는데,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곧 알게 됐다.
블루베리는 처음 익는 열매일수록 익는 순간 크기가 확대되는 속성이 있다. 블루베리 열매는 한 알씩 따로따로 익는 데다 열매 크기가 들쑥날쑥 개성 만점이다. 한데 하늘에서 비가 한번 내리면 블루베리 열매가 고루 눈에 띄게 커진다. 농사는 하늘이 도와야 함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블루베리 농사 첫해,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관정을 팠다. 관정 파던 날 생전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도구를 한가득 싣고 나타난 트럭에 탱크 바퀴가 달려 있어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기야 관정을 파려면 지형 불문하고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하기에 탱크 바퀴를 달았을 것 같다.
관정 기술자 몸값은 15년 전에도 이미 100만 원이었으니 지금은 더 올랐을 것이 분명하다. 돈 버는 능력은 가방끈 길이와 별 상관없음을 실감하면서 “충청도 돈 긁어모아 빌딩 올리셨을 것 같아요” 했더니, “빌딩은 못 올렸지만 돈은 조금 벌었슈” 하는 답이 돌아왔다. 충청도 분들 특유의 어투를 감안하면 실상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는 의미라고, 이웃집 쌍둥이 할아버지가 해석해주셨다.
첫해 팠던 우리 밭 관정은 세종시 인근에 골프장을 건설하면서 물을 대량으로 끌어가는 바람에, 이듬해 봄 말라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동네 분들 말로는 골프장은 워낙 물먹는 하마인지라 물 끌어대는 시설이 우리 밭 관정이랑은 게임이 안 될 거라 했다. 두 번째 관정을 파면서 새 물길을 찾아낸 순간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지던 관정 기술자는 시세의 반값만 받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땀과 물은 그 자체로 보약
한데 블루베리 농사를 지으면서 블루베리와 닮아가는지, 그동안 물에 무관심하던 내가 물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유학 시절 외로운 학생들이 가족과 어울려 소풍을 가던 학교 근처 공원이 있었는데, 그곳엔 공중화장실이 없다는 것이 옥의 티였다. 어딜 가든 제일 먼저 화장실 위치를 확인하던 내 친구가 화장실 가는 일에 초연한 나를 부러워한 나머지 별명을 하나 붙였는데, 바로 ‘로열 키드니’였다. 굳이 번역하자면 ‘최고급 신장(腎臟)’? 생각해보니 물은 하루 세 컵이면 족했던 것 같고, 화장실도 세 번 정도면 충분했다. 화장실을 자주 안 간다는 건 그만큼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통한다. 미국에서 콜라도 거의 안 마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데 50살 훌쩍 넘어 드디어 알게 됐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맹물이라는 것을. 땀을 흠뻑 흘린 후 마시는 물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해야 할까, 미쉐린 별 세 개 레스토랑의 대표 음식이 부럽지 않을 정도라고 해야 할까.
오십 평생에 처음으로 물맛을 발견하기 전이다. 2000년대 초반 이대 학보사 주간을 맡아, 학생 기자들과 주말이면 밤샘 작업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드러기 증세가 생겼다. 아침 점심 저녁 음식을 먹고 나면 매번 온몸에 스멀스멀 두드러기가 올라와 애를 먹었다. 원인을 찾기 위해 동네 병원부터 대학 병원까지 두루 섭렵했건만,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내부적 요인일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는 허탈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어를 먹고 나서라든가 복숭아털이 스쳤다든가, 분명한 계기가 있었다면 두드러기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어느 날 문득 두드러기가 시작됐으니, 원인은 오리무중이다. 대신 가려움증을 참을 수 없었기에 먹는 즉시 해롱해롱하는 독한 약부터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신제품까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했다. 그렇게 10년을 고생했는데, 농사 시작하고 3년 되던 해 어느 날부터 두드러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농부들은 농약을 먹어도 땀으로 다 배출될 거라는 엽기적 농담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 자신이 산증인이 된 셈이다.
여름 더위도 별로 안 타고 땀도 잘 흘리지 않던 내가 농사를 지으면서 땀을 흠뻑 흘리는 것이 어찌나 시원하고 신기하던지. 어떤 운동을 해도 농사만큼 실컷 땀 흘리는 경험을 하긴 어려울 것이다. 평생 흘려보지 못한 땀을 한꺼번에 흘리면서 그 땀과 함께 몸속의 독성이 빠져나가 10년 이상 골치 썩이던 두드러기도 물러나고, 세상에서 물맛을 능가하는 것이 또 있으랴 감탄하게 됐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는지.
그 무렵 초보 농부 아니랄까 봐 폭염경보가 발효되던 중 더위를 먹고 말았던 기억도 새롭다. 올해도 연일 세종시 재난안전과에서 폭염경보가 발령됐으니 ‘온열질환을 조심하라’, ‘물 충분히 마시고 충분한 휴식을 취해라’, ‘특별히 고령자는 대낮에 일하지 마라’ 연일 방송이 흘러나오는 중인데, 방송 들을 때마다 더위 먹었던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농장에서 폭염을 무릅쓰고 블루베리를 따다가 더위 먹었던 그날, 극심한 갈증을 느껴 1.8리터 생수병을 통째로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평소 물 세 잔이면 족하던 내가 한 번에 그 많은 물을 들이켠 것도 생소했는데, 갈증이 전혀 가시지 않는 건 정말 황당했다. 동시에 어질어질하고 메슥메슥하고 기운이 쏙 빠지고 입맛 뚝 떨어지는 날이 며칠 지속되면서 몸무게 앞자리 숫자가 5에서 4로 바뀌기도 했다. 당시 나의 입맛을 돌려준 건 동네에서 3대가 이어온 뜨끈한 설렁탕이었다.
지금 같은 농번기엔 물 1.8리터는 거뜬히 마신다. 명자 열매로 만든 명자청이 여름 갈증에 좋다는 말을 들은 후엔 명자청에 물을 타서 마시기도 한다. 물 좋아하는 블루베리를 키우며 나 또한 물과 사랑에 빠졌는데, 우리나라가 머지않아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된다고 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