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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의 고장, 수원에서… 우리소리의 진가 보여주고 싶어요”

기사입력 2014-03-27 08:23

5월10일 ‘효 대공연-소리’ 수원 공연, 명창 김영임

▲사진=경기일보

어느덧 40년. 명창 김영임씨가 국악에 몸담은 세월이다. 20년 전부터는 효(孝)를 주제로 한 공연을 펼치며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그동안 자그마치 100만여 관객이 그의 소리를 들으며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울고, 덧없는 인생역정이 떠올라 울고, 자식들이 헤쳐가야 할 인생 험로가 근심스러워 운다. 관객 모두가 자식이자, 부모이기에 더욱 깊이 공감한다. 그렇게 한껏 눈물을 쏟아내면 용솟음치는 카타르시스와 그 뒤로 잔잔히 우러나오는 애뜻함이 있다. 그래서 김영임의 소리는 효를 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한 예술인이 20년 가까이 한 주제로 콘서트를 했다면 이젠 눈 감고도 레퍼토리를 술술 외울 정도로 익숙해졌을 터.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위기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듯 김영임씨는 그날그날의 공연이 마지막인 것처럼 혼신의 힘을 쏟아놓는다.

“무대에 설 때마다 오시는 분들에게 감동이나 관객에게 좋은 소리를 들려드려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거든요. 젊을 때에는 부족해도 예쁘게 봐주셨지만, 세월이 가면 갈 수록 더 좋은 소리를 내야 하고 관록이 드러나야 하죠.”

오는 5월10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효 대공연-소리’에서 깊은 감동을 선사하게 될 그녀를 만났다.

-국악인으로 40년을 사셨다. 효 공연은 초연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관객들의 흐름도 보일텐데요.

우리 소리라고 하면 연세가 많은 분만 본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우리 공연은 어린아이부터 10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이 관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됐어요. 효 이야기를 담은 우리 소리와 연극이 함께 어우러진 공연이에요.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되고, 부모는 자식을 기르면서 헤쳐온 길을 돌아보게 되죠.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마음가짐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수원시는 효의 고장이잖아요. 5월이면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달이고. 공연의 컨셉과 가장 잘 맞는 거죠. 우리가 항상 부모님에게 잘 해야겠지만, 늘상 마음 뿐인게 우리의 걱정이잖아요. 공연이 가정의 달인 5월에 열리는 만큼 여러분들에게 오랫동안 우리 소리를 지켜온 김영임의 진가를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딸이자 며느리, 어머니, 또는 아들, 사위, 아버지의 삶을 거쳐가게 되는데 공연을 통해 효에 대한 생각과 ‘김영임이란 사람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구나’하는 감동을 주고 싶어요.

-수많은 공연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 텐데요.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주일 동안 14회의 공연을 소화했던 적이 있어요. 하루에 2회씩 연달아 무대에 올랐으니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거든요. 그렇게 마라톤 공연을 해도 다시 무대에 설 힘이 나는 이유는 제게 선물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관객들이 있기 때문이죠. 공연마다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광경이 한 장면씩은 꼭 있어요.

한번은 어머니를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로 이불을 싸서 휠체어를 태워서 오시는 며느리나 딸이 있었어요. 경희대학교 명예의전당에서는 3일간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날에는 비가 엄청나게 왔어요. 더욱이 그곳은 주차장에서 공연장을 오려면 언덕을 올라와야 해서 객석이 많이 빌 것이라고 예상했거든요. 그런데 수많은 자식들이 어머니를 들쳐업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옆에서는 며느리나 딸들이 우산을 받치고요. 그날도 객석 5천석을 가득 매웠어요. 그런 광경을 보면 제가 먼저 무대 뒤에서 감동을 받죠.

-해외 공연요청도 많이 다니시죠?

네. 1989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죠. 카네기홀은 모든 아티스트가 서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잖아요. 그곳의 3천석을 다 매웠는데, 레드카펫에 리무진에서 한복을 입고 내리는데 여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공연이 스케일이 크다보니 외국에서 개인적으로 섭외가 많이 들어와요. 지금은 LA,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요. 영국 로얄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 적도 있는데, 전통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니까 파란 눈의 단원들이 바이올린 활대를 흔들고 박수를 치며 환영을 해줬어요. 무채색 계열의 오케스트라 의상과 화려한 색감의 한복이 보여주는 대비는 소름끼치도록 멋있었어요.

▲사진=경기일보

-남편 이상해씨도 함께 무대에 오르고 계시는데, 파트너로서의 남편 이야기도 해주시죠.

콘서트 내용은 가족 이야기거든요. 사실 효 공연을 시작하게 된 것도 남편의 아이디어였어요. 남편이 연예인이다보니 관객들이 먼저 원하죠. 제 남편도 어르신들을 위해 무대에 서야겠다고 결심해 한 무대의 주인공이 됐어요. 처음엔 서먹하고 창피했지만 이제는 익숙하죠. 가끔은 나보다 이상해씨가 더 박수를 많이 받아요. 잊지 않고 공연장을 찾아주는 올드팬에게 항상 감사하죠.

최근에는 대중에게 그간 받은 사랑을 어떻게 돌려드려야 하나 하는 고민에 무료 공연을 하고 있어요. 형편 탓에 공연장에 올 수 없는 분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드리기도 해요. 제게 이런 일을 하도록 한 것도 남편이에요. ‘재능으로 솔선수범해야 한다’ ‘돈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공연을 해드릴 수 있지 않느냐’하는 동기부여를 계속 주거든요. 저도 이제는 환갑인 만큼 앞으로는 재능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국악인의 길을 가게 된 강렬한 계기가 있을텐데요?

어릴 적부터 라디오를 들으면서 노래를 따라부르고 춤추는 걸 좋아했어요. 그때 좋아했던 가수가 은방울자매, 이미자 등이었죠. 집안에 국악을 즐겨듣는 사람이 없어서 민요는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러다 언니와 함께 여성국악극단의 공연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고 국악에 빠져들었죠. 하지만 부모님은 ‘쟤가 커서 뭐가 되려고…’하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옛날엔 공부 웬만큼 해서 좋은 남편 만나서 결혼하는 걸 바람직하게 여기는게 어른들의 생각이었거든요.

오빠가 미국에 있었는데, 노래 못하게 미국으로 보내라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어요. 결국은 큰언니가 수원으로 시집을 가면서 저를 데리고 갔는데,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까 시집 보내려고 문화센터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꽃꽂이도 가르쳐줬거든요. 그런데 그게 하나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노래만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집에서 노래만은 안 되고, 무용을 가르치는 걸로 결론을 냈지만, 무용을 하면서 경기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때가 나이가 어떻게 되셨죠?

19세 때였죠. 제가 무용은 14세부터 했는데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 창부타령, 한강수타령 등의 노래가 나오는데 몸에서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그때 경기민요 명창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리로 바꾸게 된 거예요.

노래를 하기까진 수원에 계시던 큰스님이 큰 역할을 하셨죠. 언니네 집에 붙들려가서 가위로 머리카락이 다 잘릴 지경이었는데, 마침 언니가 불교신자였어요. 큰 스님이 집에 오셨을 때 언니가 ‘동생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하소연했더니 그 스님이 말하길 ‘동생은 보살님 마음대로 하는 동생이 아니다. 동생이 하고싶은 대로 놔둬야 한다’고 얘기해 준거죠. 그때 언니가 저를 놔준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제가 있게 됐죠.

-한때 가수로서, 연기자로서 활동할 기회도 많았는데 왜 굳이 국악을 고집해오셨나요?

실제 드라마를 했었고, 광고도 출연했어요. 한때에는 가요를 하라는 제의도 있었죠.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고(故) 백영호 선생님이 ‘제2의 이미자로 키워주겠다’는 제의를 해서 음반을 낸 적도 있지만, 결국 내가 갈 길은 ‘소리’였어요. 소리를 하면 온 몸에 전율이 오고, 잠을 자도 환청이 들리고, 24시간 노래로 시작해서 노래로 끝나는 일상이거든요. 그래서 요즘 문하생들을 보면 ‘너희는 왜 수업이 끝나고 책을 덮으면 거기서 끝나니?’란 말을 자주 해요. 화장실을 가든, 설거지를 하든, 차를 타고 어디를 가든 노래가 입에서 맴돌아도 노래가 될까말까 한데…. 이건 전공자에게 하는 얘기거든요. 아마추어라면 노래 한자락 배우고 나면 끝이지만, 이 노래로 인해 우리 국악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인재들은 달라야 하잖아요.

-김영임씨의 국악은 옛것이 아닌 현대적인 느낌을 연상케 한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가져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국악이라면 반드시 쪽지고 개량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대에서만 완벽하게 보여주고, 찢어진 청바지 입는 것도 좋아해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것도 좋아해요. 다만 노래방에 가는 건 싫어해요. 막힌 공간에서는 노래가 잘 안되거든요.

-개인적 취향의 문제군요.

네. 저는 국악도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 수 있는 양면성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노래할 수 있는 소양도 키워야 해요. 때로는 무대 분위기에 맞게 노래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옷도 입을 줄 알아야 해요. 그게 똑같지가 않거든요. 제가 나이 60세여도 꼭 비녀를 찌르고 개량한복을 입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저는 청바지도 좋아하고, 래깅스도 입어요. 다만 무대에서는 쪽머리를 짓더라도 제 손으로 하는 법이 없어요. 40년간 사극만 한 전문적인 선생을 모셔와서 완벽하게 기름 발라서 머리를 하죠. 화장도 전문가에게 맡기고요. 그렇게 무대에 올라야 프로페셔널한 공연을 할 수 있죠.

▲사진=경기일보

-국악 발전을 위해 여러가지 일들이 선행돼야겠지만 스타도 많이 발굴돼야 한다는 것 같아요.

우선 어린 국악인을 키우는게 시급하단 생각이 들어서 찾아가는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돈과 관계없이 어린 학생에게 우리 소리를 들려주고 교육시키는 사업이거든요. 또 제가 올해 상반기부터 국악예고를 출강나가고 있어요. 자청해서 나가는 건데 대학교는 8년 정도 출강하다가, 어린이 저학년이 중요하단 생각이라 지금 국악예고도 나가고 있어요. 시흥에 있는 국악예술고등학교. 국립이라서 국립전통예술 고등학교예요. 후진양성을 위해 길을 많이 열어놓고 싶어요.

경기일보 박성훈 기자 psho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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