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계 최초로 명품 모델로 활약, 데보라 차이 개리스

1970년대 군사독재 상황 속 외신을 접하기 힘든 우리 국민에게 갈색 폭격기 ‘차붐’의 엄청난 활약은 신문 지면 구석의 몇 줄 소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몇 글자 뉴스조차 전하지 못한 존재, 블랙 오리엔탈 ‘차이’를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뉴욕과 밀라노를 오가며 세계적 명성을 쌓았지만, 우리에게는 전해지지 못했던 스타. 한국계 최초로 국제적 모델로 활약한 데보라 차이 개리스를 본지가 만났다.
데보라 차이 개리스(Deborah Chai Garris, 70). 우리에게 낯선 이 인물의 부모는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부산의 미군 캠프 하이얼리아에서 만났다. 1951년 파병 미군이었던 벤저민 알렉산더 개리스와 경주 최씨 가문의 최문자 여사는 사랑에 빠진다. 얼마 전 손녀가 올린 몇 장의 흑백사진으로 많은 미국인에게 화제를 모았던 레딧의 한국전쟁 커플 이야기와 닮았다.

일상의 차별을 이겨낸 어머니의 힘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약혼했고, 미 정부의 허가를 위한 3년의 기다림 끝에 1954년 결혼과 함께 미국행에 올랐다. 그러나 그 땅은 환대를 약속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이 제도와 일상에 스며 있던 1950년대 미국에서, 유색인종인 흑인 남성과 아시아인 여성이 꾸린 가족은 늘 ‘다르다’는 시선과 닿아 있었다.
“어머니가 절 안고 산책을 하고 있으면 ‘어머, 아기가 선탠을 멋지게 했네요’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어요. 학교에선 저도 비슷한 처지였죠. 아버지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도 내 편이 아니었어요. 곧게 자라는 머리카락과 가는 눈 모양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했어요. 머리를 잡아당기는 식의 괴롭힘이 늘상 이어졌죠. 물론 백인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어요.”
최문자 여사는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사랑하는 딸이 가톨릭 세례를 받게 하고, 미션스쿨인 뉴욕 뉴로셸에 있는 축성성사학교에 입학시켰다.
“학교는 안전한 장소였어요. 수녀님들이 보살펴주셨고,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까요.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처럼 보였어요. 더 이상 인종적 긴장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됐죠.”
어린 데보라는 인형 같은 아이였다. 데보라가 등장할 때마다, 친한 이웃들은 ‘아기 모델’을 시켜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군인인 아버지의 동료이자 이웃이었던 포트 슬로컴 기지의 사람들은 이들 모녀에게 따뜻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 덕분에 늘 인형 같은 옷을 입었고, 화려한 모습은 어린 데보라를 더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현재 미국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 최문자 여사는 젊을 때 다양한 손재주로 가족을 놀라게 했다. 솜씨 좋은 요리사이자 살림꾼, 자수와 뜨개질, 재단과 패턴에 능한 의상 디자이너였다. 삭스피프스애비뉴 같은 백화점에서 딸과 함께 쇼윈도를 한참 지켜보고는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소소한 취미였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마네킹이 걸쳤던 것과 닮은 옷을 데보라에게 입히곤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데보라가 모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버릇없어지고 허영심이 많아질까 봐.
그녀의 어릴 적 꿈은 ‘간호사’였다. 패션 모델의 꿈이 유니폼을 입는 직업이었다니. 왜 간호사였냐는 질문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인 어머니를 두었으니까요.(웃음) 어머니는 다른 한국인 부모님처럼 자녀가 의사 같은 좋은 직업을 갖길 원했어요. 그 희망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일단 간호사가 되어 적성에 맞는지 알아보기로 했죠. 텍사스여자대학교에 합격하고 등록금까지 지불했는데, 결국 입학은 하지 않았어요. 모델이 되려고 뉴욕에 가버렸거든요.(웃음)”

자긍심으로 얼음을 깨다
1973년 여름, 열여덟 살의 데보라는 댈러스의 바비존 모델 및 연기학교에 입학한다. 모델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이곳은 텍사스와 뉴욕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는데, 학교의 소개로 뉴욕지사에서 모델 활동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화려한 모델 생활이 시작된 건 아니에요.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전화교환원이나 우편 담당 보조 업무를 해야 했죠. 옛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기계 앞에 앉아 전화가 오면 받을 사람과 연결해주는 일도 했고, 잡지에 실린 광고를 보고 모델에 지망하는 소녀들에게 답장 편지 쓰는 일 같은 것도 했어요.”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데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무대는 뉴욕 플라자호텔. 경제인 600여 명을 앞에 두고 열린 심플리시티 패턴 컴퍼니(Simplicity Pattern Company)의 패션쇼는 초년병에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중요한 행사였다. 이날을 그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긴 머리는 시뇽(Chignon) 스타일로 묶고, 가수 셰어가 입었던 것과 유사한 골드 라메 이브닝 가운에 금색 샌들을 착용한 채 런웨이에 나섰죠. 턱시도 입은 앨런 제퍼스라는 모델이 에스코트를 해줬죠. 쇼가 끝나고 정말로 ‘얼음을 깬’ 느낌이었어요. 어느 무대라도 설 자신감이 생겼죠.”
그녀의 모델 활동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따라다닌 편견과 계속 싸워야 했다. 1975년 글램비 인터내셔널 헤어살롱의 전미(全美) 캠페인 모델로 주목받았을 때, 그녀에게 따라붙은 별명은 ‘블랙 오리엔탈(Black Oriental)’이었다. 동시대의 미국 매체가 동양인을 소비하던 방식, ‘높은 광대, 가는 눈매, 선입견이 만든 틀’을 그녀에게도 덧씌우려 했다. 계약을 위해 모델 에이전시를 방문했을 때는 황당한 제안도 받았다. 성형에 대한 강요였다.
“코가 너무 커서 동양인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그래서 성형으로 코를 작고 납작하게 바꾸자는 요구를 받았죠. 물론 거절했습니다. 전 부모님이 물려주신 제 외모에 자부심이 있었으니까요. 당시 평범하지 않은 제 외모는 일종의 경쟁력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한 가지만 요구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어요. 바로 이국적인 이미지죠. 저는 그들이 보기에 충분히 하얗지도, 까맣지도, 노랗지도 않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어요. 아마 제 외모는 20년쯤 앞서 있었나 봐요. 지금이었다면 더 사랑받을 수 있었겠죠.(웃음)”

편견을 이기게 해준 차이 파워
업계가 그녀를 이국적이라는 라벨로 구분하려 할 때 더 힘찬 움직임과 워킹으로 응답했다.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견디며, 걸을 때 브랜드의 옷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속도를 터득했다. 무대에서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하게 옷을 빛내는 길을 걸었다. 그녀는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어머니를 꼽았다.
“어머니는 늘 ‘차이(Chai) 파워’를 잊지 말라며 항상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어요. 호랑이 엄마를 둔 덕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죠. 전 강요된 모습이 아니라, 내가 배우고 만든 워킹으로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
모델 데보라를 가장 먼저 인정해준 사람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디자이너 조르지오 산탄젤로였다. 화려한 색을 바탕으로 한 드레스와 수영복은 우아하고 다채로웠다. 그녀는 “내 스타일에 가까웠다”고 표현하면서 “내 움직임과 산탄젤로의 색채가 만나면 옷이 음악처럼 흘렀다”고 회상했다.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직도 그녀는 보라색을 좋아한다.
그녀의 유럽 진출을 추천한 것도 산탄젤로였다. 패션의 중심 유럽에서 경험을 쌓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그녀를 찾는 브랜드는 끊이지 않았다. 1976년부터 1985년까지 구찌, 발렌티노, 이브생로랑, 펜디, 미쏘니, 까르띠에 같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70개 이상 명품 패션 하우스의 런웨이를 걸었다.
그녀는 9월 4일 91세의 나이로 타계한 디자인계의 거장 조르지오 아르마니와도 추억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킹 조지(King George)’라 불리던 그는 남성 정장의 재단 기술(테일러링)을 여성복으로 우아하게 번안한 대가였다. 데보라는 그를 영원히 기억될 아이콘, 위대한 품격과 독특함, 그리고 친절함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했다.
“아르마니의 오디션을 본 적이 있어요. 결과는 불합격이었죠. 내 움직임이 춤 같고, 스타일이 너무 이국적이라는 평을 들었어요. 아르마니의 미학은 선형적이고 남성적 테일러링에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인연은 계속됐어요. 밀라노에 살던 시절 동네 근처에 아르마니가 즐겨 찾던 레스토랑 ‘비체’가 있었는데, 거기서 자주 마주쳤거든요. 그는 식당이 북적여도 늘 제 테이블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어요. 그에게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책을 선물했는데 무척 좋아했죠.”

한국에서 꿈꾸는 새로운 생활
데보라에게 한국이라는 모국은 어떤 존재일까. 그녀는 2023년이 되어서야 처음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절정기, 활약상이 모국에 알려졌다면 좀 더 일찍 초대하는 이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국은 외국의 소식을 충분히 접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또 혼혈이라는 조건이 당시 한국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미국인으로 살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한국어를 가르쳐주시지 않았어요. 완벽한 미국인으로 살기를 원했죠. 하지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한국 음식을 통해 어렴풋이 한국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직도 불고기나 김치, 잡채 같은 한국 음식을 좋아해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도 집처럼 편안했어요. 나의 근원은 이곳에 있는 것 같아요.”
2023년 10월 정전 70주년을 맞아 처음 9일간 한국을 찾았을 때 그녀는 울었다. 환영 만찬의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아흔다섯의 어머니와 이 경험을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미래를 상상하며 앉아 있던 소나무를 방문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난 부산은 그녀에게 고향 같은 곳이었다.
슬하의 2남 1녀, 에드워드와 리처드, 빅토리아가 모두 성인이 되어 독립한 지금, 그녀는 두 번째 인생을 꿈꾸고 있다. 바로 한국에서의 생활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시점 그녀의 일정 중심에는 국제적 패션 행사 ‘서울 패션위크’가 있었다. 한국의 패션산업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고국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누군가 저에게 ‘시니어 모델’로 활동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마침 한국에서 온 시니어 모델들이 활동하는 것을 그곳에서 볼 수 있었죠. 그렇다면 모국으로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데보라는 지금 다시 무대 가까이로 돌아오고 있다.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과 포토북 출간 준비, 한국 에이전시와의 계약, 사회공헌까지 구상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일흔 살이지만 여전히 모델입니다.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마음이에요. 마음이 젊다고 느끼는 만큼 젊어요.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어요. 잘 먹고,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즐겁게 여행하며, 스스로를 ‘놓아버리지 않는’ 삶을 사세요.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